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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유정난) 세조의 난, 계유정난 본문
조선 최고의 군주인 세종이 국가의 기반을 튼튼히 다지고 세상을 뜬 지 3년이 안돼서 지배층에서 큰 파란이 일어났다. 건국 70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쿠데타가 발생한 것이다. 이 시점이면 이 쿠데타의 장본인이 누군지는 알 것이다.
이 때 이러난 쿠데타가 바로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이다. 세종에 이어 즉위한 문종은 2년 만에 죽고 13세의 어린 단종이 뒤를 이었다. 문종은 죽기 전에 왕실인사 가운데 섭정을 맡을 이가 없음을 염려해 김종서, 황보인 등의 대신들에게 단종을 잘 보위해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그러나 정치적 야심이 대단했던 문종의 큰동생 수양대균은 김종서를 철퇴로 쳐 쓰러뜨린 뒤 궁궐에 난입해 입궐하는 신하들을 차례대로 처치했다.
한명회의 ‘살생부’에 적힌 황보인, 조극관, 이양 등의 대신들이 철퇴에 맞아죽었다. 이것으로 상황종료였다. 역사에 ‘계유정난’(계유년에 난을 바로잡다.)으로 기록된 사건이었다, 권력은 쇠몽둥이를 휘두른 수양일파에게 넘어갔다. 수양은 영의정, 이조 병조판서, 내외 병마도통사 등을 겸임하며 실질적인 왕노릇 하다 1455년 단종에게서 왕위를 넘겨받았다. 그 이듬해인 1456년 사육신이 단종 복위를 꾀했지만 내부세력 중 김질이 장인 정창손에게 거사계획을 누설함으로써 손 한번 써보지 못한 채 쉽사리 진압되었다. 세조가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운 명분은 김종서를 비롯한 조정 대신들의 모반을 진압하고 왕권을 강화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김종서, 황보인 등의 모반은 객관적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왕권강화 명분은 세조의 업적을 살펴보면 나름대로 타당해 보이기도 한다. 세조는 군사제도의 개혁에 착수해 오위체제를 확립했다. 이를 바탕으로 군사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국가회계도 체계화해 재정문제를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또한 양잠을 장려하고, 둔전을 증설하는 등 경제안정에도 힘을 기울였다. ‘팔도지리지’, ‘동국통감’을 출간해 문화 발전도 이룩했다. 그리고 ‘경국대전’의 편찬에 착수해 조선의 문물제도를 정비했다. 이런 치적은 그의 쿠데타가 어떤 의미에서는 부득이했다는 변명도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러나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볼 때 세조가 끼친 해악은 더욱 컸다. 우선 그의 집권은 도덕적으로 용남될 수 없는 것이었다. 적장자 계승이란 원칙을 파기한 것은 물론이고, 왕위를 합법적으로 계승한 단종을 힘으로 몰아낸 것은 정통성 면에서 계속 시비거리가 된다. 이런 정권은 인적 자원이 협소할 수밖에 없다. 당대의 유능한 인재들은 정치에 동참하지 않았다. 당시 ‘사육신’ ‘생육신’으로 불린 인사들이 전국적인 명망을 얻었던 것은 이러한 점을 반증한다. 결과적으로 정치, 사회적인 발전은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역사를 보면 이렇게 이야기 한다. “세조가 일으킨 계유정난은 방법은 매우 무식했으나, 나라를 바꾸기 위해서는 아주 큰 혁명이었다.”라고 말이다. 세조는 왕이 된 뒤로는 폭정을 휘두르지 않았다. 오히려 신하들과 술자리를 갔고, 자신이 당해도 “술 먹고 저지른 일은 해뜨면 무죄”라는 마인드로 신하들을 용서했다.
세조는 자신에게 씌워진 잔인한 별명들을 벗겨내기 위해서 끝없이 노력했다. 정치에 관해서 열심히 하는 것은 물론이고, 가정에, 지인들에게, 모두에게 말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세조는 역사에서 이런 별명을 벗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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