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정조, 그가 보아온 인생
조선시대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끔찍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었다. 정조 때에도 한번 그런 일이 있었는데, 바로 사도세자에 관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영화로도 나온 사건 중 하나이다.
정조는 재위 13년인 1788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양주에서 수원으로 이장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789년부터 1800년 사망할 때까지 무려 열두 번이나 사도세자의 묘인 현륭원을 찾았다. 죽을 때까지 궁궐 밖을 나가는 일이 별로 없었던 조선의 왕으로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왕이 한번 행차하면 어가를 따르는 인원이 6,000여명에, 동원된 말만 1400여필에 이르는 대규모 행사였다. 게다가 수원에 가려면 한강을 건너야했는데, 이를 위해 배로 만든 다리인 부교도 세워야했다. 큰 강을 그 많은 인원과 말이 흔들림 없이 건너기 위해서는 60여 척의 배가 동원되야 했다.
정조의 수원 행차는 당시 백성들에게 최고의 대형 이벤트였던 셈이다. 정조가 이 같은 대규모 행사를 1년에 한번 꼴로 치른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아버지 사도세자를 추모하기 위해서 일까? 여기에는 정조의 정치적 포석이 다목적으로 깔려있다. 첫 번째는 정조의 정치적 반대파이면서 당시 조정에 가장 큰 세력을 차지하고 있던 심환지 등의 노론벽파에 대한 견제였다. 노론벽파는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몬 당파였다, 현륭원 행차는 이들이 아킬레스건인 사도세자 살해를 상기시킴으로써 노론벽파의 목소리를 줄일 수 있었다. 두 번째는 백성들과 직접적인 만남이었다. 구중궁궐 속에서 신하들에 둘러싸여 있던 임금은 백성들과 만나 백성의 소리를 직접 듣고 이들의 고충을 해결해주려 했던 것이다. 신문고 제도도 있었으니 이는 절차가 복잡해 실효성이 떨어지는 제도였다. 대신 왕의 행차 때 백성들이 징을 울려 관심을 모은 뒤 얼울한 사연을 임금에게 직접 말하는 ‘격쟁’이나 글로 호소하는 ‘상언’ 제도가 효과적이었다. 정도는 열두 번의 화성행차를 통해 백성들의 격쟁과 상언을 접한 뒤 억울한 일을 많이 해결해주었다. 세 번째는 부교를 놓는 데 경강상인들의 배를 이용함으로써 당시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이들을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경강상인들은 한강을 중심으로 상품을 유통시키면서 부를 축적하던 세력이었다. 부교를 주관하는 주교사를 설치한 이유는 바로 이 경강상인을 관리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한편, 경강상인 역시 부교에 쓰일 배를 제공함으로써 세금으로 들어오는 곡식의 운반권을 독점해 많은 이득을 얻었다.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서 죽게되는 일은 조선의 방향키를 바꾼 일이 된다.” 라고 말이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자신의 아버지의 변덕 때문에 일어난 참사이다.
사람은 정말 변덕스러운 동물이다. 친하게 지내다가도 옆에서 누군가가 모함을 하면 금새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사도세자는 어떻게보면 가장 억울하게 아버지에게 배신당하고 죽게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