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나라가 망할 징조는 귀족을 보면 안다.
조선에는 수많은 개혁이 있었다. 이 개혁은 시도 때도 일어났으며, 이제는 일상으로 취급할 정도로 자주 일어났다. 민비일가가 권력을 독점하면서 개혁이 멈춰서버리고 말았지만 개혁을 준비하는 사람은 있었다.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개국 축하연회장에는 민영익을 비롯한 홍영식, 김홍집, 등 수구파 대신들과 김옥균, 서광범, 윤치호 등 개화파 소장 고관들, 그리고 영국, 미국, 일본, 청, 독일 등 각국의 외교관들이 참석해 있었다. 그런데 연회가 한 참 무르익은 밤 10시즘 어디선가 불이 났고 사람들은 혼비백산 흩어졌다.
연회장 안팎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민영익은 뛰쳐나오다가 칼을 맞아 쓰러졌다. 이것이 김옥균 등의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의 시작이었다. 계획대로 일본공사 다케조는 일본군 200명을 이끌고 고종이 있던 경우궁을 에워쌌고, 정변세력들은 창덕궁으로 진입해 민태호, 조영하, 한규직 등 수구파 대신들을 죽였다. 다음날 개혁파는 정권을 장악하고 신정부를 수립한 뒤 80여개의 조항에 달하는 ‘혁신정강’을 발표했다. 지금은 14개조만 남아 있는 정강은 문벌타파, 호조로의 재정일원화, 청에 대한 조공폐지 등이 주를 이뤘다. 대체로 청으로부터의 독립과 인민평등권 제정, 경찰제도 실시, 탐관오리 처벌, 능력에 따른 인재등용을 위한 문벌타파 등의 내용이었다. 이는 근대국가의 수립을 지향하는 진보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급진개화파의 신정부는 3일 만에 끝났다. 서울에 주둔해 있던 청나라 군대 1500명이 재빨리 공격해온 데다, 은밀히 지원을 약속했던 일본까지 외면했던 것이다. 일본은 청과의 정면충돌을 시기상조로 여겼다.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등의 정변세력은 일본공사관으로 피신한 뒤 일본으로 망명했고, 박영교, 홍영식 등은 청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일본을 등에 업은 개화파의 쿠데타는 준비 없는 행동과 일본의 배신으로 인해 한바탕의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갑신정변 당시 조선의 정치권력은 개화파와 민씨 척족중심의 고위관료들에게 있었다. 이중 민씨 척족중심의 수구파는 동양의 유교 도덕을 지키면서 서구의 기술만 받아들이자는 동도서기의 입장에서 개화정책을 추진해갔다. 그러나 이들의 개화정책은 위정척사파의 반대, 그리고 개화로 인해 생활상의 피해를 입고 있던 일반민의 불만에 직면하고 말았다. 이런 불만이 극적으로 표출됐던 것이 임오군란이다.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나라가 망할 징조는 귀족들의 행동에서 알 수 있고, 백성들의 불만은 봉기로 인해서 알 수 있다.”라고 말이다. 귀족들의 수탈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백성들은 봉기를 들고 일어섰다.
어쩌면 낮은 벼슬에 있는 양반이 일반민보다 못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고위관료들의 기에 눌려서 자신의 할 말을 못하고 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잃을게 없는 백성들은 마치 늑대무리로 변한다. 역사 속의 모든 백성들이 이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