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각

(동학) 동학의 시작 최제우

MasterJo 2016. 10. 26. 17:14

민씨일가가 권력을 쥐고 있는 동안은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분노한 백성들이 난을 일으키고 귀족들은 언제 배신당할지 모르는 입장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정치를 해야 하는 사람들은 모두 벼슬을 돈으로 산 벼슬아치 뿐 이었고, 그들은 그저 백성들을 돈으로 밖에 보지 않았다. 이런 시점에서 동학이 서서히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에는 이런 사태를 보다 못한 사람들이 나섰다. 최제우는 몰락양반의 외아들이었다. 1824년 아버지 최옥이 63세에 이웃집 과부 한씨와의 사이에서 겨우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나 한씨는 본처가 아니었다. 최제우는 서자였던 것이다. 조선이 다 망해가는 시점에서도 저사가 사회적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은 원천봉쇄돼있었다. 그럼에도 최제우는 8세 때부터 공부에 정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유학의 경전들을 다 독파했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서자는 과거에 응시할 자격이 없었다. 13세에 결혼했던 최제우는 20세 되던 해 세로운 기을 찾고자 무려 11년간 방랑의 길을 떠났다. 해보지 않은 일이 없었다. 무술을 익혀 서자도 응시할 수 있는 무과를 보려고도 했다. 장사에도 손대 포목상도 해보았다. 도를 깨우치려고 도교공부도 했다. 점술 등 잡술에도 손을 댔었고, 고승을 만나 불교의 진리를 깨쳐보려 했고, 심지어는 금지돼 있던 천주교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어느 한가지 성공한 것 없이 실의에 빠져 부인이 살고 있던 울산의 처가로 돌아왔다. 그때가 바로 31살이 되는 해였다. 그렇다고 최제우의 방랑에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전국 유랑을 하며 조선이 처한 상황과 민중의 처지를 생생하게 보았다. 폭넓은 공부를 통해 독자적인 시각을 키울 수 있었다. 돌아온 최제우는 나라와 백성을 구제할 수 있는 새로운 도를 세우려는 거대한 계획을 세웠다. 그로부터 10년간 잠을 아끼며 공부를 열심하 하면서 정신을 정결히 하고 명상에 집중했다. 그러던 중 1860년 음력 415일 마침 득도의 순간을 맞이했다. 최제우가 치성을 드리고 정신집중을 하는 중에 공중에서 천지가 진동할 때와 같은 큰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학은 서양의 도인 서학(천주교)과 대비해 동국(조선)의 도라는 뜻을 가진다. 그는 수행 끝에 열반의 경지에 올랐지만 그 경지까지 올라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희생했는지 모른다.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동학의 시작은 우리 생각하는 것보다 오래 걸렸다. 하지만 최제우 역시 준비가 필요했기에 그 정도의 시간을 가졌던 것이다.” 준비하는 과정은 길어도 좋다 하지만 준비했던 시간만큼 비례될 수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내기를 바란다.

 

결과물은 언제나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천재들은 언제나 까다롭게 결과물을 고집하고 위대한 걸작을 만들어낸다. 요즘은 돈이면 뭐든지 위조가 가능하다고는 하지만 천재들이 만들어낸 위대한 걸작만큼은 절대로 따라갈 수 없다. 그것을 비슷하게는 만들어 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절대로 100%로 까지는 만들어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