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항해 시대) 포르투갈, 향신료 찾아서 인도양까지
중국이 대항해 시대를 열 시회를 놓치자 대항해 시대를 열 열쇠를 잡을 사람이 없었던 때였다. 그러던 중에 포르투갈이 대항해 시대를 열었다. 새로운 변화가 무서웠던 다른 나라들과는 다르게 거침없이 문을 열었다.
명의 정화 사령관이 태평양과 인도양을 한창 누비고 있을 때였다. 1418년 포르투갈의 탐험대들이 아프리카 서해안을 탐사하던 중이었다. 이 탐험대에게 돈을 대주면서 전적으로 지원한 인물은 포르투갈의 엔히크 왕자였다. 엔히크 왕자는 모험심이 아주 강한 사람이었는데, 그의 머릿속은 인도로 가는 뱃길을 찾고 말겠다는 생각으로 가득찼다.
엔히크 왕자가 왜 인도 뱃길을 찾으려고 했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그 목적은 다름 아닌 후추 같은 인도의 향신료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이쯤에는 유럽에서 향신료가 부족해서 난리였기 때문이다. 향신료가 어떻게 인도에서 유럽으로 넘어온 것인지 알고있나? 우선 동양과 서양의 중간지대에 있는 이슬람 상인들이 인도 상인들에게 돈을 주고 향신료를 사고, 이슬람 상인들은 베네치아와 같은 지중해의 상인들에게 향신료를 판다. 물론 웃돈을 얹고 말이다. 지중해 상인들은 유럽 상인들에게 또 다시 웃돈을 얹고 팔기 시작하고 몇 번의 유통 단계를 거치면서 향신료의 가격은 몇 배나 비싸진다. 그래도 유럽 사람들은 후추를 살 수밖에 없었다. 고기를 주로 먹는 유럽 사람들에게 고기의 비릿한 냄새를 없애주는 향신료는 이미 없어서는 안 될 생활필수품으로 변해버렸다. 향신료가 항상 넉넉하게 공급된다면야 비싸도 살 수는 있다. 그러나 1453년 오스만 제국이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콘스탄티노플을 차지한 다음부터는 이런 무역이 힘들어졌다. 오스만 제국이 향신료의 동서양 중개무역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중해와 아라비아해에서 향신료 무역이 급격히 줄었고, 유럽 사람들은 아무리 돈이 많아도 향신료를 살 수 없었다. 결국에는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야하는 격이 되어버렸고, 유럽은 향신료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가는 뱃길, 즉 인도양 항로를 개척해야만 했다. 물론 엔히크 왕자의 탐험 정신이 없었다면 아프리카 해안을 돌아 인도로 가겠다는 모험도 없었을 것이다. 엔히크 왕자는 멀리 동방지역에 기독교를 모르는 미개한 나라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곳에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믿었다. 포르투갈은 독실한 기독교 국가였기 때문이다. 엔히크 왕자의 활약에서도 짐작할 수 있겠지만 대항해 시대의 문을 연 나라는 바로 포르투갈이었다.
우리나라 속담에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라는 이야기가 있다. 아까 위에도 잠시 나왔지만 역시 무언가를 가지고 싶은 사람은 그것을 위해서 노력을 하기 마련이고, 마치 어린아이가 시험에서 100점을 맞아서 부모님에게 장난감을 얻어낸 것과 같다.
유럽의 이런 행동들은 역사를 움직이는 행동들이었다. 어떻게 보면 유럽에서는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치는 많은 일들이 동양에 비해서 많이 일어난 것 같다. 물론 동양 역시 나름대로의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일들이 있었지만 유럽, 서양 국가들은 대중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발명 등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