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각

(역사) 우리나라가 하나로 뭉치면..

MasterJo 2017. 2. 7. 18:18

우리나라는 1900년대에 가장 힘들었던 시기이다. 많은 사람들이 각자 자신들의 생활비를 줄여가면서 일본에게 넘겨받은 빚을 갚아야만 했다. 조선은 당장 무엇이라도 하지 않는다면 국토를 빼앗길 지경이었기 때문에 서민이건, 양반이건, 귀족이건 나서서 수호운동르 해야만 했다.

 

1906년 조선의 대일 부채는 1300여만 원이었다. 당시의 한 해 세수가 약 1,319만 원에 세출이 1,395만 원인 점을 보았을 때 상환이 불가능할 정도의 액수였다. 1997년 한국이 단기외채를 갚지 못해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아 경제적 자주권에 제약을 받았던 상황을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IMF 때의 상황과는 완연히 다른 점이 있다면 당시의 국채 대부분은 조선이 일본에 용청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일 부채 대부분은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이 조선 정부 각부에 고문을 파견하는 이른바 고문정치 시기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일본인 재정고문인 메가타 다네타로가 재쟁개혁을 빌미로 화폐정리 작업에 착수하여 그에 필요한 자금 300만원을 일본에서 들여오면서 거대한 빚더미가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듬해인 1905년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한 일본은 통감부를 설치하고 초대 통감에 이토 히로부미를 파견했다. 이토는 조선의 안전과 부원 개발에 차관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며 또다시 1000만 원이라는 거액을 연 6.5%의 이율로 들여왔다. 그것도 사채를 쓰는 것처럼 소개료 100만 원을 빼, 조선에 들어온 돈은 900만 원이 전부였다. 이러한 차관은 조선정부가 필요해 들여온 것이 아니었다. 조선을 병합하려는 일본의 치밀한 계획 아래 식민지화에 필요한 자금이었다. 그럼에도 조선 정부는 감당하기 불가능 할 정도의 부채를 짊어지게 돼 경제적 예속이 불가피했다. 국채보상운동은 이런 상황을 타개하려는 전국적인 경제독립운동이었다. 국채보상운동의 봉화는 대구에서 피어올랐다. 1907129일 대구의 대동광문회 회의석상에서 서상돈이란 회원이 국채 1300만 원을 갚지 못하면 국토를 내줘야 될 판이라며 2천만 동포가 국채를 갚자는 제안을 했다. 2천만 동포가 담배를 석 달만 끊고 그 담배값만 모아도 1300만 원이 될 것이라며 자신부터 800원을 내옿겠다고 했다. 이에 광문회 회원들은 모두 다같이 담뱃대와 담배쌈지를 없애며 돈을 내놓아 총 2000원이 모였다. 대동광문회는 이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할 것을 경의하는 국채보상취지서를 발표했다. 대동광문회의 국채보상최지서는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많은 호응을 얻었다. 서울에서 그해 3월 말까지 전국적으로 27개의 국채보상운동단체가 설립됐다. 고종 역시 담배를 끊을 것을 알렸고, 한규설, 심상훈 등 대신들 역시 이에 참여했다. 하위 직급의 벼슬아치들 역시 자신의 봉급 전부를 털어서 성금을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이 운동은 큰 힘이 되었다. 물론 이런 사람들 외에도 규방에 갇혀있던 여성들도 국채보상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부인들은 먹는 쌀과 반찬을 3개월간 반으로 줄여 그 돈을 국채보상운동 기금으로 내자는 운동을 전재했고, 짚신장사, 채소장사, 떡장사 같은 행상을 하는 할머니들도 참여했고, 규방의 부인들은 은반지, 은장도, 팔찌, 목걸이 같은 패물을 의연금으로 내놓기도 했다.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국채보상운동은 우리 민족이 하나로 뭉쳤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부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실상 우리 민족이 하나로 뭉친다면 못할 일이 없다.”라고 말이다. 혼자보단 두 명이 낫고 두 명보다는 세 명이 낫다.

 

당시 1300만 원이라는 돈은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이 돈을 정부 혼자만 감당하자니.. 백성들은 그 정부를 오래전부터 신뢰하고 있지 않았기에 혹여나 국토를 일본에게 팔아넘길까 싶어서 직접 나선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모두가 하나로 뭉쳐서 힘을 보탠 덕분에 국채의 대부분을 탕감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