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관매직) 매관매직과 대한제국의 시작,
우리나라의 조선시대는 어느덧 끝나고 대한제국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진 황제국이 탄생했다. 이름은 대한제국이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초창기인지라 조선시대의 영향이 많이 남아있었다.
대한제국의 황제는 고종이었고, 그의 비였던 민비는 황후로 추존되었다. 황제국을 칭하고 국왕을 황제로 격상한 데 이어 독자적인 연호인 광무를 채택했다. 그리고 중국의 황제들이 올리던 제사의 예법을 따서 원구단에 나아가 천지에 제사를 올리며 황제 즉위식도 거행했다. 온전한 황제국 체제를 갖춘 것은 5,000년 우리 역사에서 최초로 있었던 사건이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이란 이름의 황제국 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무늬만 제국’이었다. 1897년이면 고종이 러시아 대사관으로 피신해 갔던 아관파천 뒤 독립협회와 최익현을 비롯한 유생들의 환궁 요청에 경운궁으로 돌아온 직후였다. 정궁인 경복궁을 마다하고 경운궁으로 환궁한 것은 러시아, 미국, 영국 등 외국 공사관이 경운궁을 에워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차하면 그들의 보호를 받으려는 의도에서였다. 나라를 지킬 자주적 역량도 없는 상황에서 황제국으로 격상된 묘한 꼴이었다. 그렇다면 고종은 왜 황제국 체제를 갖추었을까? 우선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을 청으로부터 독립시켰다는 것을 선전하기 위해 권했던 사실을 들 수 있다. 일본은 이를 통해 조선에 대한 청의 영향력을 완전히 배제시킴과 동시에 민비 시해에 대한 비난 여론을 무마하고자 했다. 또한 독립협회의 지식인들과 장지연 등의 유생들이 칭제를 건의했다. 황제국 체제를 선포해 독립의지를 높이자는 것이였다. 고종 역시 민비 시해와 아관파천으로 땅에 떨어진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대한제국이 성립되었지만 고종과 그의 측근이었던 김병시, 정범조, 이용익 등이 주도적으로 실시한 정책은 자주적 근대화라는 당대의 역사적 과제에 역행하는 것이었다. 민권강화를 통한 국권 확보 대신 오로지 황제권 강화에만 골몰했다. 황제권이 위협받는다고 느끼자 황국협회등을 동원해 독립협회를 해산시킨 것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1899년 제정된 ‘대한국국제’ 곧 국가의 기본 법에는 황제권을 제약한 여지가 있는 국민의 참정권이나 의회 설립 등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황제권 강화를 위해 시위부대도 증강시켰다. 그리고 황실의 재정 수입을 확대하기 위해 황제의 측근인 이용익이 내장원을 광장하면서 매관매직을 일삼아 관료들의 부패를 부추겼다. 관료들끼리의 매관매직이 일상화가 되어버리기 까지 되어버렸다. 요즘도 그렇지만 비리라는 것은 정말 나라의 찌든 때와 같다 벗겨내려고 해도 쉽게 벗겨낼 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매관매직과 지금 우리들이 흔히들 말하는 비리는 언제나 역사의 흐름 속에 녹아들어있다. 나라가 건국되고 망하는 그 시기동안에는 반드시 비리가 숨겨져있었다.”라고 말이다. 조선시대도 망하게 될 때 쯤 매관매직이 성행했기 때문이다.
역사는 언제나 사람들이 이루어간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과 사람이 살아가면서 지나가는 시간이 만들어낸 것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사건들이 터지고, 그 사건들이 역사를 이루어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고, 언제나 같은 사건을 만든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역사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