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조사사업) 일제 강점기의 그림자가 보이다.
이제 일제가 대놓고 한국의 땅을 노리기 시작했다. 전에 말했던 토지조사사업이 바로 이것인데, 이 것으로 인해서 하루아침에 자신의 땅이 일본인의 땅으로 변해버리는 일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제가 이렇게 대놓고 토지를 노리겠다고 선언한 데에는 조선 내부의 사정도 한 몫을 했다. 소유권이 불명확한 토지가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근대적 토지개념이 부족한 조선에서는 어느 정도 당연한 일이었다. 관행적으로 ‘여기는 누구 땅’ ‘여기는 어느 문중 땅’으로 소유권을 가름해온 마당에 근대적 토지 소유권 제도가 확립돼 있을 리 없었다.
탈세를 위한 땅인 은결, 왕실 소유인 궁방토, 국유지인 역둔토, 마을 공동 소유의 땅 등 분명한 소유권을 내세우기 힘든 땅이 부지기수로 널려 있었다.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진행하며 ‘기한부 신고제’ 방식을 적용했다. 토지 소유자로 하여금 일정한 기간 안에 서류를 갖춰 신고함으로써 소유권을 증명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근대적 소유제도와 행정절차에 익숙하지 않은 많은 조선인들은 큰 불편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 중에서는 억울하게 소유권을 빼앗기는 일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또 토지조사가 일제 관헌과 그 보호를 받는 지주위원회에 주도됨으로써 농민의 다수를 차지하는 소작농은 불리한 처지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전통적으로는 조선에서 소작인은 경작권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것은 특별한 결격사유나 스스로 농사를 토기하지 않는 한 인정해주던 권리였으며 전근대적인 토지소유제에서는 전 국토가 왕토였으므로 지주의 권리가 어느 정도 제약되는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일제는 이 모든 것을 부정하고 지주의 소유권만으로 토지의 소유관계를 확정했다. 안 그래도 막강했던 지주들의 권한이 더욱 강해진 것이다. 또 일제는 농민들의 입회권도 박탈해버렸다. 입회권이란 마을 주변의 임자 없는 땅에 대한 공동 이용권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농민들은 풀한 포기, 마른 땔감 하나조차 마음 놓고 구할 수 없게 되었다. 농민들이 감당해야 할 고통이 더욱 늘어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백성들이 견딜 수 있을 리가 없다. 세금도 점점 올라가고 있는 마당에 땅과 집조차 빼앗아 가버리면 그냥 나가서 죽으라는 소리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런 상황은 앞으로도 계속되었고, 점점 일제의 지배 속에 빠져들게 된다. 나중에는 일제가 대한제국을 완전히 집어삼키게 되자 독립 운동가들이 나서서 모든 것을 되돌려 놓지만 이것은 이들에게 미래일 뿐이다. 미래를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들은 그저 무기력하기만 했고, 대들어도 봤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좀 더 강력한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일제 강점기가 점점 다가오자 백성들은 무기력해지기만 하고, 정부는 점점 무능해지기만 한다.” 라고 말이다. 일본에게 틈을 보이자 일본은 바로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서 조선인들을 괴롭혔다. 그 괴로움을 아는 조선인이 단 1명이라도 더 남아있다면, 그 누구도 일본이 추악한 행동을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일본이 과거에는 매우 추악한 일들을 저질렀던 것은 맞다, 그렇다고 지금 복수할 것인가? 우리가 겪은 그 고통을 일본에게 고스란히 그대로 돌려줄 것인가? 지금 상황에서 그런 짓은 제 3차 세계대전을 불러올 뿐이다. 사람에게 가장 무거운 벌에 대해서는 이런 말이 있다. “가장 무서운 벌은 용서다.”라고 말이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아무런 대가없이 용서해줄 때, 가해자는 그 용서 때문에 끝없이 울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