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각

(대항해시대) 대항해시대의 시작, 중국

MasterJo 2017. 5. 29. 16:34

세계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제는 동양과 서양이 본격적으로 교류에 힘써야 할 때가 있다. 서양과 동양, 중동 이렇게 세 곳이 본격적으로 교류하기 위해서는 배를 통해서 대항해 시대를 열어야만 했다.

 

처음으로 해상무역을 시작한 나라는 과연 어느 나라일까? 바로 다름 아닌 중국이다. 중국은 유럽이 대항해 시대를 열기 100년 전쯤부터 아프리카로 해상무역을 했다. 명나라의 3대 황제 영락제가 통치할 때였다.

 

터키 앙카라에서 티무르 제국이 오스만 제국의 군대를 물리친 다음 3년이 흐른 1405, 영락제가 정화란 인물에게 명나라를 세계에 알리고 해상 무역을 하라고 지시했다. 정화 사령관은 배 200여 척을 이끌고 인도양으로 항해했다. 그는 2년이 지나서야 중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1차 항해를 시작으로 정화 사령관은 28년간 일곱 번이나 해상 원정을 했다. 역사학자들은 이 사건을 저오하의 남해원정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을 포퍼먼스로 보인 경기가 있었는데, 2008년 중국 베이징 올림픽 때 올림픽 식전행사에서 이 남해원정을 표현했다. 아직도 중국인들은 이 사건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중국 사람들이 자랑스러워 할 만도 하다. 유럽이 대항해 시대의 문을 연 시점은 1418년 포르투갈의 엔히크 엔리케 왕자가 탐험을 시작할 때였으니까 말이다. 정화 사령관이 첫 원정에 나설 때 다녔던 인도양 항로는 약 80년이 지난 다음 포르투갈이 발견한 항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동서양이 거의 동시에 대항해 시대를 열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중국이 먼저 세계로 진출한 첫 나라라고 주장하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중국은 아프리카로 밖에 진출하지 않았다. 케냐와 스와힐리 같은 아프리카 나라들과 무역을 했고, 말린디라는 나라에서는 사절단까지 중국에 보냈다. 아프리카에 사는 동물인 기린이 중국에 보내진 것도 이대이다.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 같은 특산품이 아프리카로 주로 납품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의 해외 진출은 남해원전 이후로는 없었다. 중국은 세계 주도권을 손아귀에 쥘 수 있는 기회를 제 발로 걷어찬 것이다. 1418년이 되자 포르투갈에서도 탐험대를 파견해서 아프리카 서해안을 탐사하기 시작했다. 아까 말했던 엔히크 왕자는 왜 대항해 시대의 문을 열었을까? 그 이유는 후추 같은 인도의 향신료를 찾기 위해서였다. 이즘 유럽에서는 후추가 부족해서 난리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향신료는 어떻게 유럽으로 넘어왔을까? 우선 동양과 서양의 중간지대에 있는 이슬람 상인들이 인도 상인들에게 돈을 주고 향신료를 구매한다. 이슬람 상인들은 베네치아와 같은 지중해의 상인들에게 향신료를 웃돈을 얹고 판다. 지중해 상인들은 유럽 상인들에게 다시 웃돈을 얹고 팔다보니 후추 값은 어느샌 몇 배를 훌쩍 뛰어넘게 되어버린다. 하지만 그래도 유럽 사람들은 향신료를 구매할 수밖에 없었다. 고기를 자주 먹는 유럽 사람들에게는 고기의 비릿한 냄새를 없애주는 후추는 이제 없어서는 안 될 생활물품이 되어버렸다.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대항해 시대가 없었다면 지금 쯤 어느 나라든지 현재보다 10년 전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나라는 10년보다 더 늦춰졌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아무리 발전이 늦춰졌어도 배를 이용한 교류는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 이유는 배가 발전하니까 분명이 서양 쪽에서 더 활발한 교류를 신청할 것이다. 그렇게 돼면 자연스럽게 발전은 급속도로 빨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