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각

(역사) 중종과 조광조

MasterJo 2017. 8. 18. 16:50

썩은 지도자가 사라진다고 해서 썩은 지배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이유는 사람의 욕심이다.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무언가를 한 만큼 무언가를 얻어야만 하며 이는 조선시대에서도 많이 다르지 않았다. 심했으면 더 심했다.

 

연산군이 왕위에서 물러간다고 한들 중종반정의 공신들의 욕심은 너무나도 강했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왕으로 추대한 중종반정은 태조 이래 세력을 더해가고 있었던 공신세력의 힘을 강화시켜주었다. 공신들은 자신의 공을 인정하는 중종을 이용해서 더더욱 많은 재물을 뜯어냈다. 중종은 어떻게 보면 많은 이용을 당했던 왕이다. 물론 조광조를 만나기 전까지 말이다.

 

우선 공신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공신이되면 본인은 벼슬이 최고 3등급, 가족들은 2등급이 상승한다. 또한 최고 30명의 노비를 하사받고, 토지도 100결에서 250결까지 얻게 되었다. 게다가 공신전은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었으니 이들이 받는 특혜는 어마어마했다. 공신의 급증은 중종반정이 물론 큰 계시가 되긴 했지만 조선 초 태종, 세조, 예종, 성종 등 즉위 과정에서 신하들의 도움을 받았던 임금들이 40~50명씩 공신을 남발한 탓도 있었다. 이 상황을 좀 더 곰곰이 생각해보면 공신들이 많아졌으니 백성들의 삶은 더 궁핍해졌다. 연산군이 폐위되기 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는 개혁이 절실한 상황이었는데 공신에 의해 왕권이 제약 당하던 중종 역시 이들을 견제할 새로운 정치세력이 필요했다. 이때 등장했던 것이 성종 때 김종직을 필두로 조정에 나선 바 있던 사림세력이었다. 이들은 개국공신세력을 뿌리로 하는 훈구파와 달리 불사이군의 성리학 원칙을 견지하면서 정치에 뛰어들지 않고 향촌에 묻혀 성리학을 탐구하던, 일찍이 고려말 이래의 중소지주출신이었다. 사림세력은 도덕성과 수신을 강조하는 성리학이 사회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학문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들 세력을 대표해 개력의 전에 나선 인물이 바로 조광조였다. 중종과 새롭게 조정에 진출한 사림세력의 뒷받침을 받은 조광조는 성리학적 이상국가를 구현하기 위해 강도 높은 개혁을 추진했다. 그 는 우선 임금과 경전을 논하고 그때그때의 정치적 문제에 대해 토론하는 경연활동과, 사간원, 홍문관 등의 언론활동을 강화했다. 또한 신료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낭관권을 강화시켰다. 낭관은 이조와 병조에서 문무관의 임명을 맡았던 정랑직으로서 재직시에는 인사권, 퇴임 뒤에는 후임자를 임명할 수 있는 추천권을 가진 막강한 자리였다. 조광조는 이런 낭관의 힘을 키워 신진사람세력의 발판을 다져나갔다. 또한 성리학적 지배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도교의식을 거행하던 소격서를 혁파하고 불교의식인 기신재를 페지시켰다.

 

중종실록에서는 조광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조광조 등이 탄핵과 논박을 크게 행하여 조정의 고관들이 주현을 범할 수가 없었고, 주현의 관리도 스스로 조심하니 백성들 사이에 근심이 없어지고 조정에도 뇌물을 쓰는 자가 없어졌다.” 라고 말이다. 조광조의 업적은 굉장한 것이다. 정치판이라는 곳은 연예계보다 더럽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인데 가장 큰 문제인 뇌물수수를 줄였다는 것 자체가 굉장하다.

 

사람은 무엇이든지 준비돼야만 한다. 준비된 사람은 무슨 일을 하더라도 뛰어난 결과를 가져오게 되어있다. 조광조는 많은 준비를 했다 성균관에서도 인정받는 학생이었다고 하니 말이다. 우리 역시 그와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날마다 열심히 자신을 갈고 닦아야만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