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각

(발전) 과학과 조선, With 외국인

MasterJo 2018. 1. 2. 17:09

 우리나라와 외국 간의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외국인들과는 언어가 통하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언어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들과의 조우는 과연 의미 있고 좋은 선택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나라와 외국과의 교류가 처음 이뤄진 때는 조선 인조 때에 제주도 앞바다에서 난파되어 

조선에 귀화해서 여생을 마친 네덜란드인 박연이라는 사람도 존재한다. 네덜란드인이 당시 어떻게 조선에 와서 정착을 할 수 있었을까? 그는 조선에 발이 묶인 뒤로는 그곳의 언어와 문화를 익혀야만 했고 무역일을 했었던 그는 대포의 화력을 올리는 방법도 조선으로 가지고 왔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그 네덜란드인의 본명은 벨테브레이였다고 한다. 조선은 주변국인 중국, 일본 혹은 북방 민족을 제외하고 서양인들이 본격적으로 오게된 것은 조선 후기이지만 그 전에도 서양인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조선에 머물러 있었던 적이 있었는데 서양인은 아니어도 이슬람인들은 고려 시대까지 우리나라를 왕래한 적이 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처용인데 처용가의 주인공인 처용은 바닷가에 떠내려 온 용왕의 아들로 표현됐지만 실제로는 난파한 이슬람 배에서 떠내려 온 사람으로 추정된다. 뭐 이렇듯 우리나라에는 알게 모르게 서양인 뿐 아닌 외국인들도 몇 명이 머물렀다는 흔적들이 남아있다. 동양인 중에서는 침략을 하러온 중국인, 일본인이 있다. 물론 전쟁 이후에도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했을 당시의 잔챙이들이 조선에 발이 묶여서 산적이 되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서양인들과의 접촉은 그저 띄엄띄엄한 수준이었다. 조선 후기로 넘어가기 전에 우리들은 흥선대원군이라는 인물을 잠깐 짚고 가야만 한다. 흥선대원군이란 조선 후기 안동 김씨의 매관매직을 비롯한 갖갖이 악행들을 근절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개혁정책을 실시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10년 만에 며느리인 명성황후에게 밀려났다. 그것은 흥선대원군의 개혁이 미래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세종 때의 영광만을 생각하면서 과거에 연연했기 때문이다. 흥선대원군의 목표는 당시 세계적 추세였던 입헌 군주 국가의 수립이 아니라 왕권 강화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향들은 곧 바로 과학의 발전을 막았고 서양 문물을 들여오는 것을 망설였으며 일부 사람들은 흥선대원군만 아이었다면 이미 미국 수준의 과학기술을 소유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의사들은 말한다. “과학의 발전이 더 일찍이 이루어졌더라면 치료할 수 있는 질병 역시 많아졌을 것이다.” 라고 말이다. 어쩌면 지금 쯤 간단한 레이저 수술이 대중화가 되었을 수도 있고 우리가 사용하는 컴퓨터나 휴대폰의 기능이 현재와 비슷한 가격에 더 뛰어난 성능가지게 됐을 수도 있다. 


  발전이 가속화 되는 것은 현재로서는 좋아 보이지만 우리들은 자원에 한계가 있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계속해서 생산하고 싶거든 시간을 투자해서 자원을 복구시키는 것을 먼저 생각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생산으로 인한 폐기물 처리 역시 생각해둬야 한다. 모든 것을 준비한 사람은 미래의 지도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