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각

(광복) 의병 활동

MasterJo 2018. 1. 8. 17:56

일본의 침탈로 인해서 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의병 전쟁이 더욱 활발하게 됐다. 의병 전쟁이 활발하게 변하면서 일본은 더더욱 악랄한 방법으로 대응했다. 일본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고종의 강제퇴위와 동시에 군대 역시 해산됐다. 그러면서 강제로 해산당한 군인들도 의병에 합세하기 시작했다. 군인의 힘이 더해지자 의병의 전투력은 더 강화되었다. 군인들이 합세하다보니 전술 같은 것도 다양해지고 항쟁도 보다 체계적으로 전개됐다. 인원이 늘어나면서 활동할 수 있는 영역도 많아졌다.


  의병들의 활동은 간도와 연해주 등 국외로까지 확대됐다. 그러나 일본 정규군의 화력에는 당해낼 수 없었다. 군 시설이라던가 무기라던가 확실히 열세였기 때문에 전면전에서는 의병이 확실하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또 때로는 양반 의병장과 평민 의병장 간에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흩어져 활동하고 있던 의병들은 1908년 13도 창의군을 결성하고 서울 진공 작전을 펼쳤지만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에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일본은 의병 활동을 뿌리채 뽑기 위해서 ‘남한 대토벌’ 작전을 펼쳤는데 이로 인해 의병들은 소규모 유격전을 전개하다 일부는 만주와 연해주로 건너가 독립군을 형성했다. 독립군의 수가 늘어날수록 일본의 탄압 더욱 강해졌다. 심지어는 독립군 내부에서도 친일파로 돌아서는 경우도 생기는 바람에 역습을 맞는 경우도 생기게 되었다. 친일파가 되는 경우는 일본의 눈에 들어올 만큼 독립군의 중요 인물이라던가 아니면 독립군에 소속되어 있는 양반계층이 주로 변질되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잇는 매국노 이완용 역시 원래는 의병 활동을 하던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친일파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의병 활동은 점점 움츠러들었다. 무리한 활동으로 인해서 전체가 위험해 질수는 없기 때문이다. 친일파의 경우 결국에는 대다수가 독립군의 손에 의해서 배제되었다. 물론 그들이 돌아섰던 이유는 일단 살아야하기 때문이었다. 의병 활동을 하다가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너무나도 많이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초에 목숨을 담보로 걸고 시작한 일임을 그들은 뻔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등을 돌린 그들은 그저 비열한 겁쟁이 불과하다는 소리다. 혹은 돈에 눈이 멀어서 그런 일들을 벌이기도 했다. 다른 것도 아닌 그저 팔랑거리는 종이쪼가리 하나에 사람의 목숨을 팔았으니 그들은 죽어서도 편하지 못할 것이다. 의병 활동의 끝은 결국 광복으로 이어졌지만 우리들은 그전에 죽은 수많은 사람들의 핏 방울을 기억해야만 한다. 그들에게도 가족이 있었고 그들에게도 생명은 소중했지만 그들은 그 두 가지모두 버렸다.


  역사학자들은 말한다. “광복을 위해서 피를 흘린 사람들은 모두 한 명의 사람이었다. 그들도 겁을 먹고 힘이 들고 좌절한다. 그러나 다시 일어선 것은 용기다.”라고 말이다. 우리들이 역사책 속에만 실려있는 이름을 기억하는 것도 좋지만 그들을 떠받쳐준 다른 이들도 기억하기를 원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신채호 선생님의 말씀 역시 우리들의 머릿속에 새겨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도저히 우리들이 앞으로 있을 일들을 감당하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