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각

(역사) 6.25와 우리들

MasterJo 2018. 1. 15. 18:20

우리 민족에게는 아주 큰 상처가 남아있다. 그 상처는 몇 십 년이 지난 지금 조차도 아물지 않고 있는 상처들 중 하나이다. 이미 지금 시대의 사람들은 자기 앞 날을 준비하느냐 바빠서 잊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1950년 6월 25일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이 날만큼은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원래는 하나였던 땅이 반으로 갈라져 두 개의 나라가 된 계기이기도 하다. 미국과 소련이 각각 반반 씩 땅을 나누어서 통치하고 우리나라가 일제에서 벗어나서 이제 자립할 수 있을 정도가 되자 미국과 소련은 각자 우리 땅에서 군대를 철수 시켰다.


  미국과 소련은 1948년 우리 땅에 주둔시켜두었던 군대를 철수시켰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련 쪽은 군대만 철수했다. 소련은 미국이 남한을 벗어나는 때를 기다려서 북한군을 이용해서 남한을 공격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무기를 대주고 중국은 독립운동을 했던 사회주의 계열의 노련한 조선인 의용군을 북한 군대에 편입시켜 북한군을 지원했다. 남한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평화로운 나날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은 전면적인 기습 공격을 시작해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그리고 7월 20일 대전을 함락시켰고, 7월 말에는 낙동강까지 진출했다. 그리고 애치슨 선언으로 우리나라를 극동 방위선에서 제외했던 미국은 일본 방위를 위해서는 우리나라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유엔 결의에 의해서 미군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을 투입했다. 유엔군은 전 세계의 용병들이 모인 군단이기 때문에 유엔에 소속되어 있던 많은 나라들이 전쟁에 개입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많은 군대들이 한반도에서 싸우는 것을 보고 어떤 사람은 마치 ‘작은 세계대전’ 같다는 말을 남길 정도였다. 전열을 재정비한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는 한편, 인천 상륙 작전을 성공시키고 9월 28일 서울을 되찾은 후, 그 기세를 몰아서 지금의 38도선을 돌파하고 10월 말에는 압록강까지 진출 할 수 있었다. 이 시간동안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을까.. 그분들을 생각하면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그러나 중국군이 개입하는 바람에 국군과 유엔군은 1월 초 서울을 다시 내주고 한강 남쪽으로 후퇴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전세를 다시 가다듬어 3월에 다시 서울을 되찾고 38도선까지 다시 밀고 올라는데 성공했다. 이후 전쟁은 지루한 소모전 양상을 띠었고 세계 여러 나라는 6 25전쟁이 제 3차 세계대전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조기에 전쟁을 끝내고자 했다. 미국과 소련 역시 확대된 전쟁에 대해 꽤 무거운 부담을 가지게 됐다. 


  역사학자들은 말한다. “한국전쟁이 계속해서 이어졌다면 우리들의 기술이 지금까지 발전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들이 이 땅에 태어났을지도 모른다.”라고 말이다. 여러 나라들이 개입하게 된 전쟁이다 보니 한반도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던 전쟁이고 그럼에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전쟁이다. 그 전쟁 속에 한국인들이 모두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는 것 역시 허무맹랑한 소리는 아니다. 우리들은 이 모든 것을 기억해야 한다. 후 세대들은 과거 세대들이 해결하지 못한 짐을 대신 짊어지고 가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