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사화와 권력
우리나라의 아주 오랜 시절, 조선이라는 나라이름을 가지고 역사를 써가던 시절에는 정말 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정치에 관련된 일이라면서 사람이 죽는 것은 일상일 정도였다. 권력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오늘 날 조선 역사에서 전쟁을 제외하고 사람이 가장 많이 죽은 사건을 뽑으라고 하면 당연히 사화가 빠질 수 없다. 사화란 정치에 의해서 일어난 내분으로 조정 관료들이 엄청나게 많이 죽은 사건들을 말한다. 우선 사화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왕 역시 폭군이여야 하는데 우리 머릿속에는 폭군이라고 하면 당연히 한 명 밖에 떠오르지 않는데 연산군 역시 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이다.
사화는 총 4번이 일어났는데 가장 처음 일어난 사화가 바로 연산군 시절 무오사화이다. 이어서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가 잇따라서 일어났다. 연산군 때는 총 두 번의 사화가 일어났고 중종 때 한 번, 명종 때 한 번 일어났다. 조정에는 훈구파와 사림파가 나뉘어져 있는데 이 네 번의 사화동안 사림파는 단 한 번도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사림파가 권력을 못 잡은 것은 아니다. 살아남은 사림파 세력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훈구파가 사라지자 권력을 쥐었다. 사화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지방으로 내려가서 서원과 같은 근거지를 만들어놓고 다시 천천히 힘을 기르면서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 같이 때를 기다렸다. 서원에 대해서 잠깐 설명하자면 서원이란 조선에 성리학이 뿌리내리는데 공헌한 성리학자들을 기리고 성리학을 연구하면서 제자들을 양성하는 일종의 성리학 사립학교이다. 사림파들은 서원을 이용해서 제자들을 양성한 뒤에 힘을 길러나갔다. 그렇게 문정왕후와 명정이 죽은 후 훈구의 세력은 끊어지고 조정은 다시 사림파 세력들로 하나 둘 씩 채워지기 시작했다. 훈구파는 사림파처럼 학풍으로 스승-제자 관계가 형성되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특정 사건을 중심으로 합쳐져서 공신이 된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맥을 이어가기 힘든 구조였다. 그래서 선조 때부터는 사림파가 조정의 중요 자리를 독차지하게 됐다. 권력의 독점이 이루어지면 결말이 그렇게 좋은 적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권력의 분배가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분명히 어디선가는 부정부패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부정과 부패는 곧 나라를 기울게 하는 큰 원인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권력을 돈 주고 사는 일이 생기면 나라가 개판이 될 것이다. 조선후기 안동김씨가 그러한 예시이다.
역사학자들은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4번의 사화가 있었고 사화마다 계기가 있지만 연산군 시절의 사화는 별개다.” 연산군 시절의 사화는 왕을 이용해서 권력을 착취하려는 무자비한 야만적인 행위이다.
사람의 목숨이 오가는 자리에는 늘 신중한 선택을 하는 리더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연산군은 신중하지도 않았고 그냥 고집불통의 술 취한 어리석은 왕에 불과했다. 과거가 어떠한들 그것에 대한 인식과 발전은 본인의 몫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