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대사)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6
우리가 고구려, 백제, 신라이 세 나라가 존재하던 삼국시대에 알고 있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가 하나 있다. 이 이야기는 불교의 아주 중요한 반석이되기도 했다. 바로 원효대사에 대한 이야기 이다.
원효는 불교가 융성했던 삼국시대와 남북국시대를 통틀어 가장 개성이 강한 승려일 것이다. 스스로 파계를 했던 중임에도 고승으로 이름을 남겼고, 불교대중화의 선구자이면서 불교사상에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원효도 30대 때는 많은 승려들이 그러했듯 당으로 유학을 가서 선진불교를 배워오는 것이 목표였다.
그래서 의상과 함께 당으로 가던 길에 서해안의 바닷가에 이르렀는데, 밤이 늦어 한 토굴에서 잠을 자야만 했다. 원효는 자다가 목이 말라 주변을 더듬었는데, 마침 바가지에 물이 담겨 있어 시원하게 마셨다. 얼마 뒤 아침에 보니 자신이 마신 물이 해골에 담긴 더러운 물이었다는 것을 알게되고 기겁을 하면서 토했다. 그런데 그때 문득 깨달았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 달렸다!’원효는 의상만 당으로 떠나보내기로 결심하고 갈라섰다. 당 유학을 포기한 원효는 관심을 저잣거리로 돌렸다. 당시 신라의 불교는 귀족중심에 머물러 있었는데, 원효는 천민이나 농민과 어울리며 이들에게도 불교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원효는 파계를 하게 되었다. 무열왕의 과부가 된 딸 요석 공주와 관계를 맺은 것이다. 원효가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주겠는가? 나는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으련다.”란 노래를 부르며 다니자, 무열왕이 이를 듣고 ‘귀부인을 얻어 아들을 낳겠다는 생각이구나’라고 해석하여 요석 공주를 만나게 한 것이다. 원효는 요석공주에게서 아들을 얻었는데 그 아들이 이두를 고안한 신라의 대학자 설총이다. 아들을 낳은 후 원효는 스스로를 소성거사 라고 부르고 저잣거리에서의 포교를 더욱 활발히 했다. 이때 원효는 우연히 만난 광대들에게서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박에는 ‘일체 무애인은 한길로 생사를 벗어난다.’란 문구가 적혀있었다. 원효는 ‘무애’란 이름의 도구를 만들고, 전통 노래 중‘무애가’를 만들어 퍼트렸다. 그는 그 노래에 무애춤도 곁들여 추며 가난하고 못 배운 이들에게 포교활동을 하였다. 무지한 이들도 ‘나무아미타불’이라는 구절만 외면 죽어서 극락정토에 갈 수 있다는 원효의 포교활동은 계속되는 삼국전쟁에 지쳐있던 일반민중에게 희망과 위안을 주었다. 이러한 불교대중화와 함께 원효는 저술에도 전념해 150권이 넘는 책을 지었다. 그는 당시 갖가지 교리와 주장이 난무하고 이론적 대립이 극심했던 신라의 불교계에 ‘화쟁사상’을 주창하여 갈등과 대립의 논리를 하나의 근원으로 조화롭게 통일시켰다. 그의 불교사상은 심오하면서도 독창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신라뿐만 아니라 중국 불교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역사학중 한 명은 원효대사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원효대사가 당 유학을 포기하고 저잣거리로 눈을 돌린 것은 정말로 불교의 역사를 다시 쓴 일들 중 하나가 되기에는 매우 충분하다.”라고 말이다. 그 덕분에 서민들도 불교에 대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는 4가지의 대표적인 종교들이 있다. 기독교, 천주교, 불교, 힌두교 이렇게 말이다. 비슷해보이는 종교들도 있지만 이 네 종교는 모두 다르다. 그 이유는 교리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원효대사 불교의 역사를 다시 쓰기 시작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