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개입)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7
삼국시대의 통일은 신라가 이루었지만 그 통일은 아쉬운 반쪽짜리 통일이다. 통일을 시킨 것 까지는 좋았으나, 나중에 후고구려, 후백제가 생긴 이유는 신라의 통일이 반쪽 밖에 안됐기 때문이다.
신라가 통일하고 무열왕 시대에 기록된 문서가 있다. 하지만 그 문서를 이 책에서는 ‘무열대왕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는 신라사람이 쓴 것 같은데, 마치 당의 일개 현의 신하가 황제에게 편지를 쓴 것 같지 않은가’라고 말하고 있다. 이 문서는 신라가 통일을 불완전하게 이루었음을 증명하는 확실한 물증이 되기도 한다.
문서에는 “고구려와 백제가 한창 왕성할 시기에는 강한 군사가 100만이나 되었으므로, 남으로 오월(남중국)을 침략하고, 북으로 유연(하북성), 제로(산동성)을 위협하여 중국에 큰 해독이 되었던 것입니다. 수 황제 양제가 망한 것도 랴오둥(요동) 고구려 정벌에서 연유되었으며, 정관 연간에 당 황제 태종이 친히 6군을 통솔하고 바다를 건너와서 정벌을 행했더니, 고구려가 위엄을 두려워하여 강화를 칭하므로 태종이 항복을 받고 행차를 돌이켰던 것입니다. 이때에 우리 무열대왕은 신하의 정성을 다하여 한 방면의 전란을 평정할 때부터 조력했으므로 당에 들어가서 알현하는 일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후에 고구려와 백제가 계속하여 나쁜 짓을 했으므로, 무열대왕은 일곱 번이나 사신을 보내어 길잡이가 되기를 청했습니다. 고종 황제는 현경 5년 (660년)에 소정방에게 명하여 10도의 강한 군사와 누선 1만 척을 거느리고 가서, 백제군사를 크게 쳐부수고 그 땅에 부여도독부를 설치하고 백제의 유민을 불러 모아 중국의 관리에게 다스리게 했는데........ 총장 원년(668년)에는 영공 서적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쳐부숴 안동도독부를 설치하고...”라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이 글은 바로 최치원이 당의 태사시중이란 벼슬아치에게 당으로 가는 신라사신의 행차에 군사와 물자를 보내달라고 청한 편지이다. 당시 신라가 삼국통일을 어떤 식으로 했고, 당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료이다. 물론 신라의 삼국통일이 우리 민족을 하나의 국가체제로 엮어낸 출발점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절반의 통일이었다는 것에 대해 아쉬움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당 나라의 힘이 너무 강력했던 나머지 신라도 손을 쓸 수 없었다.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한반도는 계속해서 중국과 일본의 침략을 받았지만 단 한번도 멸망한 적이 없는 이유는 민족의식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말이다. 우리와 비슷한 나라로는 이스라엘이 있다. 민족의 유대는 곧 그 나라의 잠재력을 표현하기도 한다. 현재 이스라엘에는 이슬람교의 성지로 불리는 예루살렘이 있기에 그 나라의 잠재력을 이미 보이고 있는 셈이다.
세계에서 멸망한 적이 없는 나라는 이스라엘과 한국 이 두 나라를 제외하고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만큼 민족의 유대가 강하다는 것이 입증된다. 역사는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려놓을 것이다. 그것이 어떤 방법이 되든 간에 말이다. 만약에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다른 나라의 개입을 받지 않았다면 우리나라는 매우 빠른 속도의 발전을 이루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