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각

(발해사)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8

MasterJo 2016. 9. 23. 16:39

고구려가 망했지만 그 정신을 이어받은 나라가 있다. 대조영이 건국한 발해라는 나라다. 발해는 책에서 중원의 신흥 강국이라고 소개할 정도 강력한 면모를 보였다. 발해는 대조영을 중심으로 처음에는 어떤 나라든지 기초에만 충실히 했다.

 

7세기말 다의 중앙에서 측천무후 등이 불러일으킨 권력투쟁이 거듭되면서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자 주변 각지의 종족들이 당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정세에를 틈타 고구려 장군출신으로 군사적 리더쉽과 용맹이 뛰어났던 대조영은 영주에서 거란인 이진충과 함께 반기를 들었다.

 

당시 고종 대신 실권을 쥐고 있던 측천무후가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군사를 동원하자,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동모산으로 탈출하여 진국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698년의 일이다. 이후 나라 이름을 발해로 바꾸었다. 발해는 대조영 때 이미 랴오둥지역을 비롯, 옛 고구려의 영토를 대부분 회복하였다. 그리고 2대 무왕 때는 동북방의 여러 세력을 복속시켜, 그 영토가 고구려의 발상지인 압록강 중류와 송화강유역에서부터 한반도 동북부, 연해주에 이르렀다. 특히 선왕 때는 당의 지배력 약화된 틈을 타서 랴오둥지역까지 진출해 동북부지역 대제국으로 위상을 과시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세력확장과 함께 당, 일본 등과의 활발한 교역을 통해 경제력까지 강해져 해동성국이란 이름까지 얻게 되었다. 그러나 10세기 들어서 발해 내부는 귀족들의 권력투쟁이 격화되었다. 당시 거란은 민족 내부의 단결을 기초로 세력을 다지면서 동쪽으로 세력 진출을 꾀하고 있었다. 동쪽의 발해로서는 이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가 필요했다. 그러나 내부분열로 인해 거란의 발흥이라는 국제정세의 판도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우를 범했다. 926년 거란이 침략하자 발해는 단 사흘 만에 무너졌다. 이후 만주는 우리 역사의 무대에서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동아시아 각국의 발해 대한 인식이 상이하기 때문에 발해사에 대해서는 더욱 신중하고도 객관적인 인해가 필요하다. 그것이 토대가 돼야 발해사는 우리만의 역사가 아닌 동아시아의 역사로서 제 위치를 갖게 될 것이다. 많은 실학자들이 여러 가지 의견을 내놓고 서로 논쟁하는 일이 당분간은 끊이질 않았다. 발해 땅이 중국과 러시아에 있었던 관계로 중국이나 러시아의 학자들 역시 연구에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각각 입장에 따라 발해사를 자국의 역사나 말갈의 역사, 혹은 만주의 지역사로 보고자 한다.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발해는 우리 한반도에서 세워진 나라 중에서 가장 혼란스러웠던 나라이기도 하다.”라고 말이다. 거란의 공격에 사흘 만에 왕국이 무너져내릴 정도면 그동안 얼마나 권력투쟁으로 혼란했는지 눈에 보인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혼란스러울 땐 나무가 빼곡이 우거진 숲을 상상하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 속에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을 때 이야기이다. 마음에 여유가 없는 사람은 숲을 상상할 시간에 자신의 할 일에, 혹은 집중하고픈 일에 집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