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녀 지은설화)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9
삼국시대를 통일했던 신라가 처참하게 무너지는 모습은 우리들이 여러 가지 설화들을 살펴보면서 볼 수 있다. 통일신라는 고구려가 최후를 맞이하는 전쟁에서 당나라가 신라도 제압한 후에 한반도의 모든 지역을 점령하려는 것을 김유신의 책략으로 막았고, 그 덕에 통일신라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었다.
효녀 지은설화에서 통일신라의 붕괴를 볼 수 있다. 통일신라가 붕괴되고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통일신라는 통일 후 중국과 일본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침략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었고, 제 아무리 중국이라고 해도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꽤 막대한 병사를 잃었기 때문에 신라에 함부로 접근할 수 없었던 것이다.
효녀 지은설화의 이야기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심청이 이야기와 비슷하다. “통일신라말 정강왕(886년)의 일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된 어머니를 봉양했던 지은은 서른둘이 되어도 시집을 가지 않았다. 어머니가 홀로 됐을 뿐만 아니라 앞 못 보는 봉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품팔이만으로는 두 모녀가 살기에 너무 힘들었다. 지은은 부잣집에 가서 자청해서 몸을 말아 그 집종이되었다. 그 대가는 쌀 열섬이었다. 지은은 하루 종일 그 집에 가서 일하고 날이 저물면 어머니에게 밥을 지어드렸다. 이런 날이 사나흘 지나자 지은의 어머니가 딸에게 물었다. ‘저번에는 음식이 거칠어도 맛이 있었는데, 지금은 비록 음식이 좋으나 맛이 그전만 못하고 속을 칼로 찌르는 것과 같으니 무슨 까닭이냐?’ 어머니는 마음으로 맛을 봤던 것이다. 지은은 사실대로 말했다. 이런 말을 들은 어머니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나 때문에 너를 여종이 되게 했으니. 내가 빨리 죽는게 낫겠구나.’ 어머니도 딸로 서로를 부둥켜안고 통곡하니, 그 소리에 길 가는 사람들도 크게 슬퍼했다. 화랑 효종량이 이를 보고는 자신의 집에서 곡식 100섬과 의복을 보내주고, 지은의 주인에게 그 몸값을 갚아 양민이 되게 했다. 효종량의 무리 몇천도 감읍해 각기 곡식 한 씩을 지은에게 주었다. 정강왕도 이 일을 알고는 벼 500섬과 집 한 구를 내주고 혹시 곡식을 도둑질하는 자가 있을까 염려해 군사를 보내 지키게 했다.” 효녀 지은설화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모두 소개된 유면한 이야기다. 마치 심청전의 한 대목을 보는 것 같다. 이 이야기는 몰락을 눈앞에 둔 통일신라말 평민들의 비참한 삶을 엿보게 해준다. 당시 삶의 기반이 없는 평민들은 품팔이를 해서 연명해야 했는데, 효녀 지은설화에서처럼 건강한 여성의 노동력으로도 두 사람의 생활조차 보장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지은은 자신을 노비로 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야기작가들은 이 이야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효녀 지은설화, 심청전을 보면 당시 시대의 엄청난 빈부격차를 알 수 있고, 고위층의 귀족들이 무자비하게 백성들의 곡식, 무질을 탈취한 것을 알 수 있다.”라고 말한다. 어떤 나라든지 몰락할 때는 가장 귀족층에서부터 썩은 물이 흐르기 시작하는 법이다.
당시 백성들은 그저 남들처럼 평범하게 농사를 짓고, 가족, 무리를 이루고 살아가기를 원했다. 하지만 귀족들은 그것을 막았고, 사회가 더 세밀하게 형성될수록 몰락한 귀족들의 수탈은 더 심해졌고, 백성들은 점점 더 피폐해져갔다. 이것은 곧 농민봉기를 불러오고 역모를 불러오는 가장 기초된 단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