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각

(거란과 전쟁) 하룻밤의 한국사-10

MasterJo 2016. 9. 27. 17:13

후삼국 역시 모두 최후를 맞이하고 새로운 나라가 생기게 되는데, 그 나라가 바로 고려다. 고려 역시 전처럼 중국의 괴롭힘을 받기 시작했는데, 이 시기는 다름 아닌 송이라는 거란에게 굴복 당했을 때이다.

 

고려와 화약을 맺었던 거란은 1004(목종 7) 송과 본격적인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끝내는 송을 굴복시켰다. 송은 강화조약으로서 전연의 맹을 맺어야 했는데, 이는 거란에게 은 10만냥, 비단 20만 필을 바쳐야 하는 굴욕적인 조약이었다. 또한 중원의 연운 16주를 거란에 넘겨줘야 했다.

 

거란은 동아시아의 최강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단지 1차 전쟁 때 접어두었던 고려를 제압하는 일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거란은 결국 1010년에 제2차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의 구실은 1009강조의 난이었다. ‘강조의 난이란 강조가 목종을 폐위시키고 현종을 즉위시킨 일로 고려의 내정문제였다. 거란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강조의 난을 핑계로 삼은 것은 강동 6주의 전략적 가치를 새삼 인식하면서 이를 돌려받고 고려를 완전히 제압하려는 뜻이었다. 10월에 40만 대군을 직접 이끌고 온 거란왕 성종은 먼저 강동 6주를 공격했다. 하지만 양규, 김숙홍 등의 강력한 저항 끝에 점령을 포기하고, 대신 우회하여 이듬해 1월 개경을 점령해 궁궐과 민가를 불태웠다. 이때 현종이 이미 나주까지 피난간 뒤였다. 거란군은 강동6주 싸움에서 타격을 입고 전투력을 유지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정령 7일만에 고려 국왕의 친조를 조건으로 철수했다. 그러나 거란군은 강동 6주를 장악하고 있던 양규 등에게 다시 한번 퇴로를 차단당한 채 엄청난 손실을 입고서야 겨우 퇴각했다. 거란군이 물러난 뒤 고려는 친조를 하지 않았다. 현종의 와병을 핑계로 거부했다. 이는 고려의 국권이 달린 문제였으므로 벼랑끝 외교로 끝내 굴복을 거부했던 것이다. 그러자 거란은 다시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했다. 그려는 한번 확보한 전략적 거점을 내줄 수는 없었다. 고려는 1014년 송에 사신을 파견하여 국교재개를 요청했다. 다음해에도 사신을 파견하여 유사시에 군을 보내줄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거란과 외교적 관계를 중단한다는 의미에서 거란의 연호 대신 송의 연호를 사용했다. 고려의 이러한 일련의 조치에 대해 거란은 제3차 전쟁을 개시했다. 1014년부터 1019년까지 네 차례의 대격돌이 있었던 제3차 전쟁에서 고려는 완승을 거두었다.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나라는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언제나 한 가지의 절대 변하지 않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방어에 매우 강하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병인양요 등 많은 전쟁이 있었지만 방어에 대해서는 아주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가 이런 수많은 전쟁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았던 이유는 뛰어난 전략을 가진 장군들과, 장군들을 믿는 병사들의 마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로 불찰이 조금 있었겠지만 곧 바로 딛고 일어나서 다시 한 번 적들을 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