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문세족) 고려, 멸망의 시작
고려시대의 권문세족이 백성 수탈이 심해지기 시작하자 왕위 귀에도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달리 막을 방법이 없었다. 고려는 권문세족의 세상이 되어버렸다. 권문세족 자녀들은 모두 고위 관직에 올라서 고려를 지배했다.
고려는 점점 더 썩어들어 갔고 백성들은 이 모든 상황을 해결해줄 영웅을 원했다. 고려사에는 권문세족을 간악한 도당이라고 말하고 있고, 그들이 얼마나 많은 재산을 수탈했는지를 알 수 있다. 흡사 어떻게 보면 피라미드 사업을 하는 사람들과 같다.
고려사에는 “요즘 들어 간악한 도당들이 남의 토지를 겸병함이 매우 심하다. 그 규모가 한 주보다 크기도 하고, 군 전체를 포함해 산천으로 경계를 삼는다. 남의 땅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이라고 우기면서 주인을 내쫒고 땅을 빼앗아 한 마지기의 주인이 대여섯 명이 넘기도 하며, 전호들은 세금으로 소출의 8~9할을 내야 한다.” 군 전체를 포함해 산천으로 경계를 삼을 정도의 농장은 권문세족들이 얼마나 많은 토지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말해준다. 그렇다고 이들이 토지의 주인이었던 것은 아니다. 고려의 토지제도인 전시과로 볼 때, 그들은 세금을 받는 토지의 전주일 뿐, 토지의 본래 소유주는 전객이다. 하지만 전주의 권리는 나라에서 봉록으로 내준 토지의 10분의 1세를 받을 권리만 갖는 것이다. 그러데 토지의 주인이 대여섯 명이란 것은 힘을 가진 권문세족이 갖은 억지로 토지의 소유권을 주장해 농민들에게서 세금을 강탈했다는 이야기이다. 농민들은 권문세족이 있는 개경으로 세금을 내러 갈 때 그 운반비도 전액 부담해야했다. 여기에다 온갖 부역, 또 왕실에서 쓰는 물품을 대는 공납까지 평민들 삶의 고단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니 농사를 지어봤자 세금 내면 남는게 아무것도 없었고, 차라리 농토를 떠나는 게 훨씬 속 편했다. 그들은 유랑민이 되어 결식을 하거나 산으로 올라가 산적이 되었다. 나라 입장에서는 세금을 낼 평민이 적어져 재정이 고갈되었다. 병역을 짊어질 젊은이도 많지 않아 국방력 손실도 이만저만 아니었다. 고려 토지제도의 근간인 전시과제도가 권문세족의 토지 겸병과 세습으로 인해 문제가 된 것은 이미 12세기 중반부터였다. 고려의 왕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름대로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1170년 무신정변 이후 급격한 정세변동으로 인해 내정개혁을 이룰 틈이 없었다. 충선왕과 충목왕이 개혁을 시도했지만, 원을 등에 업은 권문세족의 거센 반발로 개혁은 몇 달도 못 가 좌절되고 말았다. 개혁의 마지막 기회는 공민왕 대였다. 공민왕은 즉위하자마자 직접 정치일선에 나서 왕권을 강화하는 방책을 마련했다.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한반도의 역사 중에서 고려시대 때만큼 개혁이 절실하고, 개혁이 많았던 적이 없다.”라고 말이다. 고려가 얼마나 권문세족이라는 벌레들에 의해서 썩어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고려는 매우 연약한 나라였다. 언제나 위태로웠고, 언제나 힘들었다. 백성들과 왕 모두 말이다, 그저 권문세족이라는 귀족들만이 잘 먹고 잘사는 세상이 되어버린 이상 이성계 장군이 고려를 갈아엎기 전까지는 앞날이 캄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