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쾌락+광기=연산군
수양대군이 왕위에 올라서 세조가 된 후 모두가 알고 있는 역사가 또 쓰여지게 된다. 바로 연산군의 대한 이야기 이다. 흔히 연산군이라고 말하면 조선의 폭군 중 하나로 알려져 있는 연산군에 관한 이야기 이다.
조선시대 왕 중에서 ‘조’나 ‘종’으로 추증되지 못하고 군으로 남은 임금은 노산군 단종과 연산, 그리고 광해군이다. ‘군’은 임금이었음을 인정받지 못하고 왕자로 남았다는 사후의 평가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중 노산군은 야심이 많았던 숙부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비운의 왕으로, 사후에 단종으로 복권되었다.
광해군은 ‘폭군’이란 말에 어울리지 않게 상당히 신중한 임금이었다. 명이 쇠퇴하고 청이 발흥하는 격변기에 평화를 지켜낸 현군으로 평가할 만한 측면이 강했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 반대파인 서인세력의 쿠데타에 의해 축출되었다. 이에 비해 연산군은 이들 두 임금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는 진짜 폭정을 일삼아 왕위에서 내쫒긴 왕이었다. 말하자면 왕으로서 정치를 잘못해 정통성을 상실한 군주였던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연산군은 즉위과정에서 선대의 어느 임금보다 큰 정통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적장자 계승이란 원칙에 걸맞게 연산군은 아버지 성종의 장자로 태어나 9세 때인 1484년 세자로 책봉됐다. 그로부터 11년간 당대 최고의 학자들에게서 재왕학을 익혔다. 세자의 일과는 공부로 시작해 공부로 끝나는 것이었다. 그런 준비 끝에 1494년 젊음이 넘치는 1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당시 19세이면 지금의 20대 후반이라고 볼 만한 나이였다. 그는 말 그대로 ‘준비된 군주’였다. 당시 백성들과 신하들 역시 연산군이 즉위할 때 ‘영명한 왕’이라고 칭송하며 그의 덕치를 한껏 기대했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얼마 안가 산산히 부서졌다. 즉위 초기에는 정사에 의욕을 보이는 듯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사치스럽고 방탕한 생활에 빠졌다. 이런 연산군의 패악에 대해 사헌부, 사간원, 홍문과 등의 언관들이 직언을 하자 연산군은 무오사화를 일으켜 많은 사람들을 숙청했다. 마치 그 모습은 광기서린 사춘기 아이들과 같다. 거기다 자신의 직위는 왕이라는 맨 꼭대기 층이었으니 못할게 없었다. 사림세력을 제거하자 연산군은 거리낄게 없었고, 임사홍, 신수근 등 외척을 중심으로 측근세력을 구축하고 절대왕권을 휘두르며 학정을 일삼았다. 성균관을 기생과 노는 유흥장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했었고, 전국에 채홍사니 채청사니 하는 관리를 보내 미인들을 불러 모았다. 이렇게 모은 미인이 2,000여명에 이르렀는데,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창덕궁을 중축하는 대형공사를 벌여야 할 정도였다.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연산군을 왕위에서 내린 것은 조선 역사 중에서 잘한 일 Top 20안에 드는 일이다.”라고 말한다. 연산군이 계속해서 왕위를 맡았다면 중국의 침략으로 인해서 나라가 망했을 것이다.
연산군은 그저 자신의 쾌락과 욕망에만 빠져 살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어릴 적에 어른들이 하시는 말들 중에서 “사람이 베풀고 살 줄 알아야 사람들이 좋아한다.”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연산군은 베풀기보다는 빼앗기를 먼저 했고, 남에게 무언가를 베푼 적은 거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