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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대한민국의 어린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날인 어린이 날! 이 날은 과연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물론 이 어린이날이 생기기 전에 우선 어린이운동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청년운동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어린이운동이었다. 최남선이 ‘어린 이’란 말을 사용한 이래 격식을 갖춰 높여 부른 ‘어린이’를 발명한 것은 소파 방정환이었다. 방정환은 청도교소년회를 조직해 어린이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방정환은 “어린아이도 한울님을 모셨으니 아이를 때리는 것은 한울님을 때리는 것”이라는 2대 교주 최시형의 말과 천도교가 어린이를 바라보는 관점을 잘 이용했다. 방정환 역시 천도교의 3대 교주 손병희의 사위로서 이런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인물이었다. 방정환과 천도교소년회는 1922년 5월 ..
이제 일제가 대놓고 한국의 땅을 노리기 시작했다. 전에 말했던 토지조사사업이 바로 이것인데, 이 것으로 인해서 하루아침에 자신의 땅이 일본인의 땅으로 변해버리는 일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제가 이렇게 대놓고 토지를 노리겠다고 선언한 데에는 조선 내부의 사정도 한 몫을 했다. 소유권이 불명확한 토지가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근대적 토지개념이 부족한 조선에서는 어느 정도 당연한 일이었다. 관행적으로 ‘여기는 누구 땅’ ‘여기는 어느 문중 땅’으로 소유권을 가름해온 마당에 근대적 토지 소유권 제도가 확립돼 있을 리 없었다. 탈세를 위한 땅인 은결, 왕실 소유인 궁방토, 국유지인 역둔토, 마을 공동 소유의 땅 등 분명한 소유권을 내세우기 힘든 땅이 부지기수로 널려 있었다.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진행하며 ..
우리나라는 1900년대에 가장 힘들었던 시기이다. 많은 사람들이 각자 자신들의 생활비를 줄여가면서 일본에게 넘겨받은 빚을 갚아야만 했다. 조선은 당장 무엇이라도 하지 않는다면 국토를 빼앗길 지경이었기 때문에 서민이건, 양반이건, 귀족이건 나서서 수호운동르 해야만 했다. 1906년 조선의 대일 부채는 1300여만 원이었다. 당시의 한 해 세수가 약 1,319만 원에 세출이 1,395만 원인 점을 보았을 때 상환이 불가능할 정도의 액수였다. 1997년 한국이 단기외채를 갚지 못해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아 경제적 자주권에 제약을 받았던 상황을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IMF 때의 상황과는 완연히 다른 점이 있다면 당시의 국채 대부분은 조선이 일본에 용청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일 부채 대부분은 1..
고려시대는 정말 화려하게 빛낫던 때가 있기도 했지만 때로는 혼란스럽기도 했다. 언제나 그 혼란의 중심에는 귀족들이 있었는데, 몰락한 귀족들이 백성의 땅과 재산을 수탈하면서 백성들의 삶이 빈곤해지기 시작했다. 1352년 10월 22세의 공민왕이 왕위에 올랐다. 원 간섭기의 막바지였고, 부패할 대로 부패한 권문세족의 전횡이 극에 달한 시기였다. 이듬해 2월 원에서 돌아온 공민왕은 벼르고 벼르던 개혁에 착수했다. 귀국 두 달 만에 전격적으로 착수한 일은 무신정권의 최이가 설치해 인사를 좌우하던 정방의 폐지였다. 그 다음날엔 개혁교서를 발표하여 토지와 노비에 관한 제반문제를 해결할 것을 명했다. 멀쩡한 양인을 노비로 삼아 맘대로 부리고 남의 토지를 빼앗아 농장을 확대해가는 권문세족에 대한 전쟁 선포였다. 그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