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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각

(민비) 민비 시해사건

MasterJo 2017. 2. 6. 18:38

민비하면 우리들이 대표적으로 떠올리는 사건이 하나 있는데 바로 민비 시해사건이다. 우리들은 아직 이 사건에 대해서는 많은 진실들을 알지 못한다. 청일전쟁에서 이길 때만 하더라도 일본은 득의양양했다.

 

2000년 이상 넘어설 수 없는 장벽으로 여겼던 중화제국을 무력으로 제압한 것은 일본뿐만 아니라 서구 열강도 경악한 일대 사건이었다. 승리감에 도취된 일본은 조선에 대한 배타적인 지배권을 확립한 뒤, 청으로부터 거액의 배상금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요동반도와 대만등의 영토를 할양받아 대륙진출의 근거지를 확보했다. 그러나 이런 일본의 독주에 러시아를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은 경계심을 되찾았다.

 

제국주의 나라들은 모두 일본을 조금씩 경계하고 있었고, 견제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특히 만주로 진출 뒤 한반도 해안에 부동항을 건설해 남으로 진출하려는 러시아에게 일본의 독주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18954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요동반도를 청에게 돌려줄 것을 일본에게 요구했다. 이러한 러, , 프의 3국 간섭에 일본은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으로서도 세 나라 모두와 대결을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청나라를 상대로 싸워서 손해를 본 것도 이만 저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게 저 세 나라와 붙었다가는 나라가 멸망될 수도 있었다. 이런 러시아의 파워에 민비는 주목했다. 민비는 러시아와의 관계를 긴밀히 하고자 했으며 러시아 공사 베베르 역시 조선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영향력을 극대화하고자 했다. 이러한 정세 변화에 일본 조야는 매우 화가났으며 위기의식이 들 수밖에 없었다. 민비 시해는 3국 간섭 이후 새롭게 서울에 부임해 온 미우라 고로 일본 공사가 주도했다. 그는 육군 중장 출신이었지만 일본에서는 정계에 별다른 움직임 없이 공사관 2층에서 불경을 외우는 데만 심취하여 독경 공사라는 별명을 얻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단순하고 우직해 보였던 미우라는 비밀리에 민비 시해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미우라의 계획은 대원군을 부추겨 민비 시해에 가담하게 하고, 일본군에 의해 육성됐지만 지금은 세상이 바뀌어 해산된 훈련대의 불만을 이용해 배후병력으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1895820일 새력 3시 대원군을 가마에 태운 뒤 공덕동을 출발한 일본 낭인과 훈련대 병사 등은 아침이 밝아올 무렵 경복궁에 도착했다. 그리고 선두에는 일본 낭인패 50여 명이 민비를 찾아 경복궁으로 난입했다. 비록 배후에 500여 명의 훈련대와 일본군 수비대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경복궁에 난입한 낭인패는 50여 명에 불과했다. 자칫 잘못하다가 민비가 세워 둔 계략이있었다면 그 50명은 물론, 뒤의 500명 마저 처리될 수도 있었다.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민비가 시해되기 전에 언제나 비장의 수를 숨겨뒀더라면 죽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미신에 빠져있는 민비가 정신을 차릴 리가 없다.”라고 말이다. 민비는 무당과 점쟁이들에게 몇 백만 냥의 돈을 가져다가 바친 여자이기도 하다.

 

민비 시해사건은 어쩌면 백성들에게는 통쾌한 일 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사건은 여전히 많은 논란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논란 끝에 일본이 시해를 주도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사람 한 명이 죽는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므로 미련한 사람이 죽은 것은 더욱 불쌍하게 여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