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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를 들여다보면 세계적인 스케일의 전쟁을 세계대전이라고 말하는데, 그 세계대전은 어떻게 일어났을까? 나라간의 갈등과 불신이 깊어져서 일어난 것일 수도 있고, 한 나라에서 갑작스럽게 기습을 했을 수도 있지만 오늘 날 우리에게는 보다 확실하게 알 권리가 있다. 우선 1914년 6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부부가 암살당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터진다. 나라에서는 이 사건을 반란으로 규정하고 독일에게 지원을 요청하는데 독일은 삼국동맹의 정신에 따라 오스트리아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때는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앞으로 일어날 전쟁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고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는 7월 28일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당시 세르비아의 뒤를 봐주고 있던 국가는 다름 아닌..
산업혁명으로 인해서 많은 발전이 있었던 가운데 과학 역시 혁명이 일어났다. 과학의 발전으로 산업 역시 더더욱 강화되었고, 많은 것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이 새롭게 변화된 것이다. 18세기에 일어났던 과학혁명은 19세기에도 계속되었는데, 1807년에 미국에서는 증기기관을 사용한 배, 즉 증기선이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 선보이게 되었다. 허드슨 강을 달리던 이 증기선은 석탄을 원료로 사용하던 그 전의 배보다 속도가 무려 3배 이상 빨랐다. 이게 점점 과학이 발전하는 것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1820년쯤에는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버스가 첫선을 보였고, 1825년에는 시속 50km의 속도로 달리는 기관차까지 나왔다. 철도와 기관차는 산업의 발전 속도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아주 좋은 도구가 되..
역사의 시간은 무한히 흐르고 또 흘러서 근대까지 오게 되었는데, 이때부터는 전 세계가 180도 달라지게 된다. 많은 것들이 변하고 마치 게임에서 대규모 패치를 한 것 같이 새로운 것들이 많이 생겨나게 된다. 바로 산업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19세기 전반부의 유럽의 역사는 정치적인 측면들이 많았지만 유럽은 누가 뭐라고 그래도 1848년이 가장 인상적일 것이다. 유럽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똑같이 혁명이 일어났다. 정치는 정말 어수선했던 반면 산업과 과학은 꾸준하게 발달하고 있었다. 이 쯤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러시아 등 열강들이 세계의 거의 모든 땅을 식민지로 만들어버리고 마는데, 식민지의 백성들은 마치 무슨 계획이 짜여진 듯이 당연하다는 듯이 매일 매일을 괴롭게 보내야만 했다. 이제부터 열강의 힘..
전쟁은 정말 여러 가지를 이유로 터진다. 양 국가 간의 문제도 있겠지만 민족 간의 문제로도 쉽게 일어나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 이다. 하지만 지금 와서 잘 돌아보면 어쩌면 우리 삶이 전쟁과 같을지도 모른다. 1337년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전쟁이 반발했다. 바로 전에도 말했던 백년전쟁인데, 백년 전쟁은 영국과 프랑스가 국경의 문제로 일으킨 전쟁이며, 생각보다 빨리 끝낼 수도 있었던 전쟁이었는데, 생각보다 아주 오랫동안 전쟁이 이어졌다. 그렇게 의미도 없고, 사상자만 왕창 생겨나는 전쟁이 터지고 말았다. 1337년 시작된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은 15세기로 접어든 후에도 진행되었다. 15세기 초반에는 프랑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프랑스의 왕은 샤를 6세였다. 당시에는 그가..
우리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가? 우리들은 때로는 자신이 게으르지는 않은가? 혹은 너무 바쁘게 살아가면서 자신을 혹사시키지는 않는가? 자기 자신을 관리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오늘에 충실하기’라는 것을 가장 어려워한다. 한 순간의 딴 생각으로 그것이 무너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을 무사히 버텨낸 다음 하루를 알차게 보내는 사람은 정말 굉장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라는 것이 무조건 오늘 자신이 해야 하는 스케일대로 움직여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방심하면 중간에 한눈을 팔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루, 24시간을 살아가면서 약 10시간 정도를 하루 필수 스케줄로 잡는다, 그리고 나서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 혹은 필수스케줄에서 약간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서 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며칠 동안은 짧은 평화가 찾아왔다. 전쟁의 흉터를 복구하는데 각 나라들은 힘썼고, 많은 사상자가 나왔으므로 그들을 위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전쟁터에서 죽은 군인은 훌륭한 희생이라는 생각이 그 시대 사람들의 머릿속을 맴돌기 시작했다. 1943년 11월 미국, 영국, 중국의 세 정상이 이집트 카이로에서 회담을 가졌다. 이 ‘카이로 회담’에서 처음 한국의 독립이 논의됐다. 세 정상은 “일본은 식민지를 모두 내놓고, 한국의 독립절차를 밟는다”고 합의했다. 한 달 뒤인 1943년 12월 이란 테헤란에서 미국, 영국, 소련의 정상들이 모였다. 이번 회담에서는 중국이 빠지고 소련이 참가했다. 이때 루스벨트와 처칠, 스탈린이 회담에 나왔다. 이 테헤란 회담에서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독일 군대는 매우 막강했다. 하지만 러시아에서 많은 전력을 소비한 탓에 앞으로의 전투에서 승리를 확신하기에는 조금 힘든 상태가 되고 말았다. 독일 군대가 소련에서 고전하고 있을 때였을 것이다 1941년 12월 일본은 태평양 정복에 나섰다. 일본 공군은 하와이 진주만에 있는 미국 태평양 함대를 기습 폭격했다. 미국 해군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일본은 기세를 몰아붙여 태평양 일대의 나라들을 차례차례 정복해 나갔다. 그러나 1942년부터 일본은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미국과의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한 뒤로는 빠른 속도로 일본 군대가 약해졌다. 여기에는 일본만의 독특한 전투 기법에 대해 알아보자.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을 잡았을 것이다. 일본 공군은 전투기에 탄 채로 미국 함대로 돌진했다. 이 자살공격을 한..
제 1차 세계대전이 종전 된 이후에도 나라간의 전쟁은 간간히 일어났다. 하지만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또 다시 거대한 전쟁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려고 하는 것이다. 당시 독일의 지배자였던 히틀러는 파시즘을 처음 만든 무솔리니를 무척 존경했었는데 히틀러는 이런 무솔리니와 가까워지고 싶어했다. 그러던 와중에 기회가 생긴 것이다. 바로 에스파냐 내전이다. 이 내전은 에스파냐에 새로 들어선 공화국 정부에 반대하며 파시스트인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일으킨 거였다.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프랑코 장군을 지원했다. 파시즘과 나치즘이 이 전쟁을 계기로 가까워진 것이다. 이 내전은 여러 국가가 개입했기 때문에 작은 세계대전이라고도 불린다. 중일전쟁이 터지기 한 해 전인 19..
잠시 눈을 돌려서 제국주의에 저항하고 있는 아시아 국가들을 살펴보자 크게 달라진 점은 없지만 이미 19세기 때부터 열강의 지배를 받아왔기 때문에 열강의 착취가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더 강력하게 반발하는 점이 생겼다.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사실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게 약간은 위안이 됐다. 물론 우리 민족의 입장에서는 호시탐탐 한반도를 노리는 일본의 승리가 달갑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과 인도 사람들은 일본의 승리를 ‘아시아’ 관점에서 해석했다. “아시아 인종이 유럽 인종보다 열등하다고 누가 말했는가?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지 않았는가? 일본은 아시아 국가가 아닌가?” 라고 말이다. 근데 이 이야기도 일본의 직접 지배를 받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다. 싶다. 우리로서는 씁쓸하지만 일본의 ..
유럽의 열강들은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끝없이 사람들을 해치기 시작했고, 어느덧 그런 행동들이 꽤나 길어질 때 쯤 우리들이 알고 있는 바로 세계적인 큰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다. 1914년 8월 4일 독일이 벨기에를 전격 침략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음을 알리는 신호인 것이다. 독일이 워낙 빠르게 공격해 들어왔기 때문에 베기에는 제대로 저항도 못해보고 무너지고 말았다. 독일 군대는 서쪽으로는 프랑스 파리를 향해 진격했고, 동쪽으로는 타넨베르크에서 러시아와 일전을 치렀다. 독일의 동서 지역에서 전쟁이 치러짐으로써 각각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으로 불렀다. 독일은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치밀한 전략을 짜 놓았다고 한다. 벨기에를 후딱 해치운 다음 정신 차릴 시간도 주지 않고 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