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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백년전쟁에 대해서. 본문
전쟁은 정말 여러 가지를 이유로 터진다. 양 국가 간의 문제도 있겠지만 민족 간의 문제로도 쉽게 일어나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 이다. 하지만 지금 와서 잘 돌아보면 어쩌면 우리 삶이 전쟁과 같을지도 모른다.
1337년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전쟁이 반발했다. 바로 전에도 말했던 백년전쟁인데, 백년 전쟁은 영국과 프랑스가 국경의 문제로 일으킨 전쟁이며, 생각보다 빨리 끝낼 수도 있었던 전쟁이었는데, 생각보다 아주 오랫동안 전쟁이 이어졌다. 그렇게 의미도 없고, 사상자만 왕창 생겨나는 전쟁이 터지고 말았다.
1337년 시작된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은 15세기로 접어든 후에도 진행되었다. 15세기 초반에는 프랑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프랑스의 왕은 샤를 6세였다. 당시에는 그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는 소문마저 돌기 시작했다. 사실인지는 아직까지 잘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왕의 권력이 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귀족들은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파로 갈려 서로 싸우기만 했다. 프랑스의 내정이 이런 상황인 걸 안 영국은 당연히 신날 수밖에 없었다. 이 틈에 얼른 물량을 최대한 확보해서 그동안 밀렸던 전세를 역전시킬 기회를 노려야만 한다. 영국에게는 이만한 기회가 없었다. 1413년 영국의 왕에 오른 헨리 5세는 프랑스의 부르고뉴파를 매수해 영국의 편으로 만들었다. 프랑스에서는 매국노가 판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영국이 머리를 잘 쓴 것이다. 어쨌든 매국노가 가득한 프랑스에서 뭐 하나 제대로 굴러가는 일이 없었다. 나라재정, 정치 등등 말이다. 영국은 부르고뉴파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 북부 지방의 도시들을 정복하는데 성공했다. 프랑스에게 큰 위기가 닥친 것이다. 영국 왕 헨리 5세는 프랑스 왕 샤를 6세와 협상을 벌였다. 정말 정신질환이 있어서 판단력이 흐려진 것일까? 그는 순순히 프랑스 왕 자리를 넘겨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로써 헨리 5세는 프랑스의 왕까지 겸하기 위해서 우선 샤를 6세의 딸과 결혼했다. 그러나 헨리 5세는 프랑스의 왕이 되지 못했다. 그 꿈은 그의 아들인 헨리 6세가 대신 이루어줬다. 1422년 생후 9개월의 헨리 6세가 왕이 되자 영국은 헨리 6세가 프랑스 왕을 겸한다고 선포했다. 그러나 샤를 6세의 아들인 샤를 7세는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샤를 7세는 그 자리는 자신의 자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자신이 올라야 마땅한 자리에 다른 누군가가 앉아있다면 그 누구라도 기분이 나쁠 것이다. 그는 결국 아르마냐크파를 이끌고 프랑스 중남부 지역에서 계속해서 저항을 했다. 하지만 그의 저항은 지나가는 사람이 봐도 매우 위험한 저항이었다. 그 이유는 샤를 7세가 집 한 채 정도의 세력을 가지고 있다면 헨리 6세는 거대한 성 정도가 되는 세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도 샤를 7세가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샤를 7세는 자신을 구원해준 잔다르크를 계속해서 자신의 곁에 두었다면 그는 영국과 프랑스를 모두 통치 할 수 있는 자리에 올랐을 것이다.” 라고 말이다. 잔다르크의 손에 의해서 구원받은 샤를 7세는 후에 잔다르크가 마녀 의혹을 당하자 모른 척하고 말았다. 결국 잔다르크는 마녀라는 누명에 씌워져서 화형당했다.
사람은 사람을 믿어야만 공동체를 만들 수 있고, 사람은 자신을 믿어줄 만한 사람에게 “나는 너를 믿어”라는 증표를 먼저 보여줘야만 한다. 이미 사회는 삭막하다. 이 삭막한 사막같은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라면 사람을 믿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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