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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영국은 산업이 일찍 시작된 만큼 환경 변화도 빠르게 일어났다. 당시에는 석탄이나 석유 같은 자원들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무땔감을 연료로 삼아야했는데, 그러는 바람에 나무들이 거의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잠시 16세기 중반의 영국으로 가보자. 이때 영국 산업은 침체기였다. 쌀이 있어도 불을 피울 땔감이 없으면 밥을 지을 수 없지 않는가? 이때 영국이 딱 그 꼴이었다. 산업이 한창 발전하고 있는데 연료가 없었던 것이다. 불과 100년도 안되는 짧은 시간에 산업을 빨리 발전시키다 보니 문제가 생기고 만 것이다. 너무 많은 나무를 한꺼번에 베어 써 버렸고, 어느 새 땔감이 바닥이 난 것이다. 연료가 없으니 산업도 침체의 늪에 빠졌다. 18세기로 막 들어설 때쯤 영국 사람들은 새로운 연료를 찾았..
독서를 할 때 우리들은 기본적으로 한 권의 책만을 바라보면서 읽는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효율이 떨어지는 독서일 수도 있다. 한 번에 여러 권의 책을 읽을 수 있다면 어떨까?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해봤을 상상이다. 이 책의 저자는 독서법 강의를 하면서 한 가지 안타까운 현상을 보았다. 한국인들이 너무나도 천편일률적으로 독서를 한다는 점이다. 정해진 틀과 방식, 의무감에 매여 힘들고 어렵게 독서를 한다.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기상천의한 독서법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는 60억 명의 인구가 존재하고 그 중의 독서의 고수는 매우 많다. 어떤 독서 고수들은 열 권의 책을 동시에 읽는다. 이렇게 읽으면 저자가 만들어놓은 틀과 사고의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수동적인 독서, 한 권의 책..
큰 적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곰을 잡기 위해서는 곰 사냥용 총을 구매하듯이 말이다. 강한 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하려면 그 나라의 지휘관 보다 몇배는 더 뛰어난 지휘관을 가지고 있지 않는 이상 패배할 확률이 더 높다. 샌델은 레이건에게서 “기꺼이 참석하겠다.”라는 메시지를 받아낸 샌델은 전의를 불태웠다. 자신에게 있어서는 아직 자기가 완전히 상대하기에는 매우 힘들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더욱 열심히 몰두했다. 밤을 새워가면서 말이다. 여러 가지 공격 패턴을 준비하기도 했고, 근거 없는 말을 준비해보기도 했다. 샌델은 며칠 밤을 새우다시피 해 길고 긴 질문 목록을 만들었다. ‘18세가 월남전에 참전할 수 있다고 하면서 왜 18세에게 투표권을 주는데는 반대하는가?’와 같은 민감..
기차도 달리다보면 기차역에 잠시 멈춰서야하는데 마틴 루터 킹 역시 사람이기에 잠시 휴식이 필요했다. 지난 몇 달 동안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많은 것들을 이루어왔기 때문에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몇 달 동안 시민권 관련운동으로 심신이 피곤해진 루터 킹은 주위의 권유에 못이겨서 병원에서 휴식을 취하고 정밀신체검사를 받았다. 검사를 마친 다음날 아침, 루터 킹은 아내의 전화로 잠에서 깨어났다. 뉴욕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아내에게 전화연락이 왔는데, 노르웨이 의회가 루터를 1964년의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노벨상은 10년의 한 명 정도 수상자가 나올까 말까한데 루터 킹은 그런 업적을 이룬 것이다. 잠에서 덜 깬 상태여서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 없었으며 너무나 뜻밖이어서 처음..
흑인들의 자유는 번번이 백인들이 막아섰지만, 결국 백인들은 흑인들에게 질 수 박에 없었다. 그들은 너무나도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언제나 한걸음 씩 나아가는데 그 한걸음은 지금의 미국을 만드는 아주 거대한 도약이었다. 1965년 초여름의 일이다. 키고 흑인지도자들에게서 흑백차별이 없는 질 높은 교육을 쟁취하기 위한 자신들의 투쟁을 지원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마틴은 시카고의 교육개혁운동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었으며, 시카고 시민권 단체지도자들과 회의를 거쳐서 7월 24일부터 시카고 운동을 지원하기로 했다. 시카고는 당시 미국에서 흑백차별이 악명을 떨치고 있었는데, 마틴 루터 킹은 이 운동에서 꽤나 애를 먹었다. 마틴 루터 킹을 중심으로 모인 흑인들은 ‘지역사회조직 통합위원회’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이 조..
샌프란시스코의 흑인들이 자신들 만의 권리를 주장하고 안전성을 보여주면서 평화를 되찾으려고 하던 시기와 비슷한 시점에서 마틴 루터 킹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아직 흑인들이 완전한 자유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더 고민해봐야 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조금 이라도 더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는 흑인들이 투표권을 얻을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판단을 내렸다. 1964년 2월 스칸디나비아에서 돌아오는 길에 마틴은 존슨 대통령을 만났다. 서로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가 투표권 문제로 화제를 돌렸다. 존슨 대통령은 “킹 목사, 흑인들이 투표권을 손에 넣어야 한다는 당신의 주장은 옳습니다. 언젠가는 나도 흑인들의 투표권을 인정할 계획입니다. 하지만 이번 의회 회기 중에는 투표권 관련 법안을 통과시킬 수 없습니다.(중략)”이..
시간이 흐르면서 잘못된 정치를 펼치고 시민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지도자는 언제나 그렇듯 영웅에 의해서 무너져 내렸고 우리는 지금 그것을 혁명이라고 부른다. 지금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이 바로 혁명이다. 1964년이 되면서 모든 사람들이 흑인혁명과 시민권 법령의 의미를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법령이 통과되자마자, 전국을 뒤흔든 몇몇 사건이 발생했다. 이러한 사건들은 암흑 같은 노예제도가 완전한 자유상태로 바뀌는 그날까지 흔들림 없이 혁명을 계속해야 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다시금 인식하게 만들었다. 마틴은 1964년의 중대사건으로 샌프란시스코의 공화당 전당대회, 미시시피에서 일어난 세 건의 끔찍한 린치 사건, 북부의 몇 도시에서 발생한 소요 등을 언급하고자 한다. 공화당의 공약은 인종차별..
사람은 자신이 걸어가는 길에 대해서 한 번쯤은 끔찍하게 고민을 해본다. 그 속에서 자신의 잘못된 것을 깨닫고, 새로운 자극을 얻기 위해서 먼 나라로 여행을 가기도 한다. 마틴 루터 킹 역시 자신이 꿈꾸어왔고 언제든 한 번쯤 가보고 싶었던 곳으로 떠나게 된다. 그가 가보고 싶었던 곳은 인도였고, 인도의 관심이 생긴 것은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주의 운동이 인도를 휩쓸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에서 보면 ‘어릴 적부터 나는 도양에 대해서 묘한 매력을 느꼈다.’라고 쓰여져 있는데 여기서 보면 마틴은 오래 전부터 동양으로 여행을 오고 싶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몽고메리 보이콧 운동 중에 인도의 간디 성인은 비폭력적인 사회변혁의 방법을 찾아가는 흑인들에게 빛을 던져주는 등대였다. 버스 내 흑백차별 철폐운동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미국 곳곳을 돌아다니시면서 흑인에 대한 차별을 무너뜨리는 큰 계획을 세웠다. 우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가야하는 곳이 몽고메리였는데 그곳은 흑인을 벌레 취급할 정도로 흑인 차별이 심한 곳이었다. 몽고메리 버스의 흑백차별은 아주 심각했는데, 버스보이콧운동이 있기 전에는 버스운전사들이 흑인들을 ‘검둥이’ ‘검은 원숭이’ ‘검은 젖소’라고 부르는 일도 많았다. 흑인승객들은 앞으로 타서 차비를 내고 나서 뒷문으로 올라타기 전에 버스가 떠나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더욱 충격적인 일은 빈 좌석이 있는데도 흑인이기에 서서 가야 하는 경우였다. 마틴은 흑백차별이 이정도로 심한 것은 처음으로 목격하게 되었다. 흑인들은 백인전용으로 지정된 앞좌석 네 중에는 절대 앉을 수 없도록..
마틴 루터는 자신의 손으로 흑인들을 백인들의 폭행 속에서 건져 내기 전까지 백인들에게 박해를 받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자신의 눈으로 바라보았던 백인들의 부정함을 못마땅하게 여겨서 흑인들과 함께 자유를 찾았던 것도 있겠지만 목사라는 직업의 사명이 있기에 그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마틴 루터는 열다섯 살이라는 나이에 모어하우스 대학에 입학했다. 아버지와 외할아버지도 모어하우스를 졸업하셨으니 루터의 집안은 삼대가 모어하우스 대학에 적을 두고 있는 셈이었다. 대학에 갓 입학한 루터는 여러 어려움을 겪었다. 고등학교 성적은 우수했지만, 독해 능력은 8등급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2학년 과정을 마친 상태에서 3학년 과정을 밟지 않고 대학에 입학했을 뿐 아니라 그 전에도 한 학년을 건너뛴 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