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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동학이 모여서 농민군을 이루다 본문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내전들과 전쟁이 있었다. 그 전쟁 에피소드 중에 찾아볼 수 있는 것이 바로 동학농민전쟁이다. 그 전쟁은 우리나라에 동학이 퍼지면서 생긴 불화들을 모두 없애고자 했던 전쟁이다.
백범 김구는 19세에 이미 황해도 해주에서 동학의 지역 포교책임자로 접주로 임명된 바 있는 동학교도였다. 어린 나이에 수백의 교도를 거느렸기에 ‘아기 접주’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가 쓴 ‘백범일지’에는 당시 동학이 어떻게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전국으로 퍼져갔는지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 있다. 백범은 1893년 나이 열여덟이 되던 해,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에게 입도한 최도명이란 동학 선생을 마을 인근에서 만났던 적도 있었다.
그때 최도명이라는 사람과 백범은 서로 오가는 말 끝에 백범은 동학에 입도해 열심히 공브했고, 드디어는 2대 교주인 최시형을 직접 만나 접주로 임명되었다. 또한 해주 지역의 동학 대장으로 700명의 동학군을 지휘하며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하기도 했다. 몰락한 양반가의 서자 출신으로 현세에 좌절했던 수운 최제우가 1860년 4월 민간신앙을 바탕으로 유교, 불교, 도교 3대 동양 종교의 핵심사상을 종합해 만든 동학은 근본 바탕이 민중종교일 수밖에 없었다. 손병희에 의해 인내천 사상으로 발전한 수운의 천심즉인심 사상은 불평등 신분사회에서 지배층의 착취에 신음하던 민중에게 복음과도 같았던 것이다. 서양 세력의 정치적, 경제적 침탈에 대해 불안해하던 민중을 위무하기에 충분했다. 대항이념으로서의 동학과 나라를 지키겠다는 동학의 보국정신은 평민 신분으로 세상에 뜻을 펼치는데 근본적 장애가 있었고, 지배세력의 무능과 부패에 절망했던 백범 김구 역시 다른 민중들과 마찬가지로 동학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교세는 무섭게 확장했다. 최제우는 1861년부터 본격적으로 포교하기 시작했는데, 소문이 퍼지자 6개월 만에 선비로부터 농민에 이르기까지 3000여 명의 사람들이 제자가 되었다. 그 이듬해에는 경주, 대구, 단양 등 전국 각지에 교회라 할 수 있는 접소를 설치하고 책임자인 접주를 두어 교세를 확장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동학 세력의 확장에 위협을 느끼고 1863년 1월 최제우의 참형과 지속적인 탄압에도 불구하고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에 의해 포교는 지속되었고 교세는 더욱 확장되었다. 최시형은 삼남지방과 도시 지역에까지 확장된 교세에 힘입어, 참형 당한 교조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교조신원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동학의 위력은 정말 무시무시했으며, 마치 이슬람교가 번창하는 것과 비슷한 속도로 발전하는 종교였으므로, 당시 정부가 놀랄 수밖에 없었던 점이 이해된다.”라고 말이다. 이슬람교도 엄청난 속도로 번창한 종교이지만.. 당시 조선에서 유행했던 동학은 정말 나라를 갈아엎고도 남을 정도의 세력이었다.
사람이 뭉치면 정말 못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구를 멸망시키는 일도 가능하고, 나라를 바꾸는 것도 가능하고, 세계를 하나로 묶는 것도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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