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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전쟁) 북진이나 남진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본문
우리나라에는 아주 뼈아픈 과거가 있다 바로 6.25 전쟁인데 그 전쟁에서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없게됬고, 따라 떨어져야만 하는 그런 불행에 놓인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지금은 전쟁 끝난 후 약 60년이 넘게 흘렀다.
반탁운동의 논리적 귀곁이 분단이었다면 분단의 끝은 전쟁이었다. 광복과 동시에 미소 양군의 분할 점령이 이루어지던 순간, 전쟁은 이미 예비 된 결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전쟁이 벌어지기 전까지 국내외적으로 벌어진 막전막후의 사정은 복잡했다. 전쟁을 피하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국내의 좌우합작운동을 제외한다면, 이런 노력은 주로 미소 두 강대국에 의해 전개되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대표하는 두 나라의 충돌은 자칫하면 제3차 세계대전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문제는 남북한의 정권이었다. 북한은 남한에 대한 적화통일을 1945년부터 꿈꾸고 있었다. 혁명 역량을 길러 남한을 공산화한다는 민주기지론이 그 증거였다. 또 김일성이 1949년 신년사에서 국토완정론을 언급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완정’이란 ‘나라를 완전히 정리하여 통일한다’는 것으로 이른바 통일전쟁의 수행을 의미했다. 여기에 남로당의 완전한 괴멸 이전에 돌파구를 열어야하는 박헌영의 절박한 처지도 이런 흐름에 일조했다. 전쟁을 꿈꾸기는 남한 정권도 마찬가지였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발전을 꾀해가던 북한과 달리 남한은 혼란 그 자체였다. 계속되는 좌익의 투쟁과 토벌작전, 경제위기, 1950년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의 이승만 세력의 참패 등 아주 많은 일들이 있었고, 이 모든 일들은 마치 지반처럼 척척 쌓여갔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은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라고 외쳤다. 이것이 북진통일론이었다. 이것은 북과의 갈등을 이용하여 반대파를 탄압하고 정치적 위기를 뛰어넘고자 하는 의도였다. 문제는 날로 첨예해지는 남북 갈등이 지도자들의 정치선전이나 허세정도로 마감될 성질이 아니라는 데에 있었다. 1949년 38선은 이미 불붙기 시작한 폭탄 덩어리였다. 옹진반도와 해주 등 여러 요충지에서 수천 명의 병사가 동원된 전투가 벌어지고 사상자도 수백 명이 발생했다. 1949년 한 해 동안 남과 북은 38선을 둘러싸고 거의 매일 충돌했다. 이처럼 호전적인 기운이 높아지는 가운데 전쟁은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왔다. 당시 주한 미 대사인 존무쵸는 “한국군의 상당수가 진격하기를 열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통일을 달성하는 유일한 길은 무력으로 북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북도 마찬가지로 남진을 꿈꿨다. 그렇게 어느 쪽이 먼저 공격할 지를 두고 시간이 조금 흐르자 북한이 새벽을 틈타 남진을 시작했다.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남한과 북한 둘 다 전쟁을 원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둘 다 똑같은 사람들이라는 걸 부정할 수 없다. 우리가 먼저 공격했더라면 먼저 남한은 역사에게 외면 당했을 것이다.”라고 말이다. 물론 어떻게 보면 북한이 선수쳤던 것이기도 하지만 남한 측에서도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은 결국 두 나라다 똑같은 사람들이었다는 것 외에는 할 말이 없다.
무력을 사용한 평화는 얼마나 지속될지 모른다 어쩌면 금 새 다시 갈라져서 싸우게 될 수도 있다. 지금의 상황에서는 우리들 쪽이 당연히 우세하겠지만 무력으로 이룬 통일이 절대로 잘했다고 칭찬 받을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건 6살 꼬맹이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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