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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성계와 최영 그리고 신진사대부

MasterJo 2018. 2. 1. 18:09

조선이 건국됨을 선포하고 신진사대부들이 권력을 잡고 정치를 시작했다. 그 가운데서는 정도전과 정몽주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들은 권문세족이 훈고학을 붙잡고 있는 사이에 성리학을 받아들여 개혁하고자 했던 무리들이다.


  성리학은 종래 글자의 해석에 힘쓰던 훈고학이나 글 짓는 것 중심의 유학과는 달리 인간의 심성과 우주의 원리 문제를 철학적으로 연구하는 개혁적 신유학이었다. 고려에 성리학을 처음 소개한 사람은 충렬왕 때 안향이었다. 뒤를 이어 이제현이 원나라에 설립된 만권당에서 성리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난 후 다시 고려로 돌아와서 성리학을 전파했다. 이 때 이색, 정몽주, 정도전 등이 대표적인 제자로 남아있다.


  이 성리학을 수용한 사람들은 거의 다 권문세족이 아닌 새로운 지식에 관심을 보인 지식인들이었다. 경제적으로는 지방의 중소 지주층이었고, 신분적으로는 지방 향리층이 대부분이었다. 대부분이라는 소리는 권문세족 역시 몇몇 있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들은 권문세족들의 전횡과 부정부패, 모순을 시정하기 위한 개혁 사상으로 성리학을 받아들였다. 이들은 현실 사회의 개혁을 위해서 일상생활과 관련된 실천적 기능을 중요하게 여겼다. 특히 성리학적 이상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당시 고려 시대의 중심 종교이자 사상이었던 불교를 적극적으로 비판했다. 고려 우왕이 즉위하자 권문세족의 토지겸병이 확대되면서 다른 사대부들과 신흥무인들의 재산이 불안하게 되자 신진 사대부들은 권문세족 중에서도 유일하게 물욕이 없는 최영과 이성계를 지원하여 권문세족인 이인임 일파를 조정에서 축출했다. 이것으로 인해서 권문세족보다 최영과 손잡은 신진 사대부들의 권력이 한 층 더 강화되었다. 그러나 이 둘의 관계도 그렇게 오래가지는 못했다. 중국에서 새롭게 강자로 자리 잡은 명나라가 철령 이북의 땅을 내놓을 것을 주장했기 때문인데 여기서 최영과 신진사대부가 갈라서게 됐다. 이유는 그 둘의 대응법이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최영은 나라를 보강하는 방법을 택했다면 신진 사대부는 기존의 것을 허물고 새로운 것을 만들자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최영과 권문세족들은 명나라의 강요가 자주성을 침해한다고 하면서 요동정벌 이라는 방법을 왕에게 아뢰었다. 반면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는 중국에서 새로운 강자로 자리 잡은 만큼 그들과 싸우는 것은 좋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결국 신진 사대부 세력과 연합한 이성계는 요동정벌을 단행한 최영에 대항하여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회군해 정권을 잡았다. 


  역사학자들은 말한다. “최영의 방식이었다면 또 다시 나라가 엉망진창이 될 확률이 매우 높다. 망가진 것을 고친다고 해서 두 번 고장 나지 않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라고 말이다. 이성계의 방법이었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반면 또 다시 나라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을 모두 축출할 수 있다. 이 두 방법의 차이점은 이런 부분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성계의 방법이 무조건 옳다고 할 수는 없고 최영의 방법이 무조건 옳다고 역시 말할 수 없다. 단 그 방법의 결과에 따라서 어떤 것이 조금 더 뛰어난 방법이었는지가 결정될 뿐이다. 오늘 날 역사는 이성계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