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를게임같이
(개혁) 신돈의 개혁, 하지만 못 다 이룬 꿈 본문
공민왕이 개혁을 주도하려 했을 때, 결국에는 권문세족에 의해서 짓눌리고 말았지만 아직 개혁의 실은 끓어지지 않았다. 공민왕에게는 아직 신돈이라는 카드가 남았고 그 카드가 어던 작용을 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신돈은 공민왕의 개혁을 맡기에 딱 좋은 책임자였다. 권문세족이 아닌 것은 물론이고, 초야신진도 아니었다. 초야신진이란 명성을 얻었다하면 초기의 개혁의지는 온데간데없이 권문세족과 혼인을 통해 줄을 대려고 했던 사람들을 말한다. 개혁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한미한 집안출신으로 무명의 승려인 신돈은 자신의 사욕을 채울 당을 만들 이유도 없었고, 민초들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잇는 인물이었다. 공민왕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신돈은 맨 먼저 토지와 노비 개혁에 착수했다. 당시 가장 큰 사회경제적 문제는 권문세족들의 민중에 대한 토지와 인력의 수탈이었다. 힘있는 권문세족들은 힘없는 백성들의 토지를 빼앗거나 국가의 토리를 몰래 빼돌려 거대농장을 형성했다. 그리고 광활한 토지를 경작하기 위해 멀쩡한 양인을 노비로 삼아버렸다. 이러다보니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 유랑민이 되어 전국을 떠돌면서 초적이나 산적의 무리를 이루기도 했다. 이는 사회불안의 요인이 외었다. 또한 권문세족은 세금을 내지 않아 국가의 세수가 줄어들었다. 토지문제는 그간 몇 차례에 걸쳐 해결해보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개혁대상인 권문세족이 추진했으니 제대로 될 리가 없다. 하지만 신돈은 과감했다. 개혁기구인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고 직접 책임자가 되어 다음과 같은 명을 내렸다.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수도는 15일, 지방은 40일 이내에 돌려주어라, 이에 따르는 자는 불문에 부치겠지만 기한을 넘기는 자는 엄중하게 처벌하겠다.” 이런 엄중한 명령에 귀족들은 빼앗은 토지와 백성을 돌려주지 않을 수 없었다. 백성들은 이 소식을 듣고 “성인이 나왔다!”며 감격해했다고 한다. 신돈은 개혁의 제도화도 시도했다. 지방으로 물러난 관리들이 백성을 수탈하지 못하도록 하는 규제책을 마련했다. 그리고 권문세가의 자제들이 남보다 빨리 승진하는 특권을 없애기 위해 자격에 따른 승진제도를 마련했다. 그는 성균관을 다시 세우고 과게제도도 개혁했다. 그러나 신돈의 개혁에 역풍이 불어 닥쳤다. 기득권세력은 처음에는 잠자코 보고 있었지만 자신들의 기반이 흔들리는 것을 감지하자 강력한 반격에 나섰다. 신돈에 의해 등용되었던 신진사대부들 또한 왕도정치를 내세우며 왕의 직접통치를 건의했다.
역사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신돈은 엄청난 힘으로 권문세족을 견제했지만 권문세족을 외 다른 세력들 까지는 견제하지 못해서 결국에는 다른세력에 의해서 무너지고 말았다. 신돈이 모함을 당해서 죽지만 않았아도 고려는 충분히 예전만큼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었다.”라고 말이다.
사람들은 지금에 멈춰서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우리나라는 절대로 더 이상 성장할 수 없고, 결국에는 다른 나라들보다 훨씬 더 뒤떨어진 나라가 되고 말 것이다. 언제나 개혁이 필요하다. 내 안에 잘못된 것을 개혁하고 다시 새로운 것을 세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나의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시대 개막) 조선시대의 문, 드디어 열다. (0) | 2016.10.11 |
---|---|
(권문세족) 고려, 멸망의 시작 (0) | 2016.10.10 |
(권문세족) 고려, 멸망의 첫걸음 (0) | 2016.10.06 |
(고려시대) 중국 상인들과 고려 (0) | 2016.10.05 |
(고려시대 예술품) 고려 청자, 중국의 태평노인도 인정한 예술 (0) | 2016.10.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