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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비) 민씨일가의 만행 본문
조선은 의외로 여러 나라들의 침략을 많이 받았다. 나라의 위치가 워낙에 바다와 대륙으로 이어져 있다보니 여러 나라가 탐내는 땅이 되었다. 고려시대 때도 무역이 활발했던 것을 생각하면 왜 한반도가 그렇게 침략을 받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1882년 7월 23일 무위영과 장어영의 구식군인들은 평소보다 표정이 밝았다. 13개월이나 밀린 급료가 한달치나마 나온다는 남이기 때문이었다. 한 달 치라도 받으면 기아 직전의 생활에 다소 희망이 보일 듯도 싶었다. 그러나 급료로 받은 쌀을 보자 군인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쌀의 양이 적었을 뿐만 아니라 썩은 쌀에 모래와 돌이 숱하게 섞여있었던 것이었다.
그 누구도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할 보상이 엉터리이거나 조금 이라도 화가나기 마련이다. 군인들에게 줄 쌀을 병조판서이자 선혜청 당상인 민겸호가 착복하였고, 그 밑의 말단 관리들까지도 한몫씩 챙긴 결과였다. 군인들은 쌀 수령을 거부하며 창고관계자들에게 격렬하게 항의했다. 이에 병조판서 민겸호는 난투를 주도한 군인 몇을 체포하여 본보기로 처형할 것을 명했다. 이런 극단적인 조치에 군인들은 민겸호의 집에 쳐들어가 집과 가구를 닥치는 대로 파괴한 뒤 포도청, 의금부를 습격하여 갇혀 있던 동료와 정치범을 해방시켰다. 그리고는 민씨일족을 중심으로 한 친일파 중신의 집을 차례차례 습격해 중신들을 살해하고 일본공사관을 공격했다. 이어 마침내는 창덕궁에 진입해 원한의 표적인 민비를 찾아 궁의 이곳저곳을 파괴했다. 여기에는 군인들뿐만 아니라 인근의 하층민까지 대거 합류했다. 군인들의 반란에 민중이 대거 합류한 것은 그간의 악정의 원흉이 민비라고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민비를 중심으로 한 민씨일족은 권력을 장악한 지 9년 만에 나라를 완전히 거덜내고 있었다. 군인들의 봉급을 13개월치를 못 받은 것 이상으로 조정의 문무백관은 5년 이상 봉급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이런 재정고갈에도 불구하고 민비는 두 살배기 아들을 세자에 책봉하기 위해 청나라의 실권자 서태후와 리홍장에게 뇌물로 수백만 금을 바치고. 미신숭배에 빠져 수천만 냥의 재물을 점쟁이나 무당에게 안겨다주는 등 상상을 넘어서는 낭비를 일삼고 있었다. 그 결과 대원군 집권시절에는 충실했던 국고는 텅 비게 되었다. 그리고 준비 없는 개항으로 조선민중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일본이 조선에서 수입해가는 물품의 80%는 쌀이었기 때문에 쌀값이 폭등했다. 여기에다 일본에서 수입해온 면화와 잡화로 인해 조선의 목화농업과 수공업은 쇠퇴했다. 전통적인 산업기반이 와해왜 일자리를 잃은 실업자가 속출했다. 민중들이 고통스런 삶의 원인이 바로 민비에게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민비는 너무나도 사치스러운 여자였고, 미신을 숭배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이미 조선의 국고에는 3/2 정도가 비어있는 상태였다. 거기에다가 뇌물을 바칠 금을 준비하려고 했으니 백성들이 힘들 수밖에 없다.” 라고 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여자나 남자나 사치를 부리자면 끝이 없다.
민비의 사치는 도를 넘어선지 오래였고 이미 관직들은 매관매직을 통해서 벼슬을 산 벼슬아치로만 가득했다. 이런 정치인들이 무슨 정치를 할지는 안봐도 뻔하다. 정치인들은 정치를 하기 위해서 언제나 준비되어야 하고 그 준비는 나를 위한 방법이 아니라 시민들을 위한 방법이여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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