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를게임같이
(한국전쟁) 한국전쟁, 시작과 끝 본문
한국전쟁은 우리 민족의 깊은 상처 상처이다. 200만 명이라는 사상자가 나왔고, 가족을 잃어야만 하는 슬픔이 있었다, 그 상처는 아직까지도 아물지 않고 있으며 그날의 악몽을 기억하는 사람들 역시 존재한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은 선전포고도 없이 38선을 넘어 남한을 공격했다. 그 전에도 군사분계선 주변에서 작은 충돌이 있었다. 남한 정보는 전쟁이 터졌을 거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남한은 당장 싸울 수 있는 준비 역시 되어있지 않았다. 더군다나 남한은 제대로 된 전차 한 대도 없었다.
남한은 군사력에서부터 차이가 나기 시작했다. 그러니 당연히 밀릴 수밖에 없었다. 남한 정부는 대전으로 급히 피난을 떠났다. 정부는 북한군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한강의 다리를 폭파해버렸다. 이 때문에 많은 서울 시민들이 피난을 떠나지 못했고 이 작전은 두고두고 욕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이기심이 않은 대참사에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북한군은 전쟁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북한군은 한반도의 남쪽으로 진격했고, 무능한 남한 정부는 대전에서 이리, 목포, 부산까지 도망가야만 했다. UN 안전보장이사회가 남한을 돕기로 결의했다. 미국을 비롯해 16개 나라에서 군대를 한국에 파견했다. 미국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군대는 낙동강을 최후의 마지노선으로 삼고 북한군과 맞섰다. UN군과 한국군은 북한군을 다시 북쪽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UN군과 한국군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했다. 9월 28일 서울을 되찾았고 10월에는 압록강, 11월에는 두만강까지 진격했다. ‘북진통일’이 이뤄지려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12월 중국이 전쟁에 뛰어들면서 북진통일의 꿈은 마치 사막의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다. 한반도 전체가 자유진영이 된다면 중국으로서도 부담이 되었다. 중국이 전쟁에 뛰어든 이유다. 엄청나게 많은 중국 병사들이 징과 꽹과리를 치며 달려들었다. ‘인해전술’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우리 군대는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과 북한 연합군은 1951년 1월 4일 다시 서울을 점령했다. ‘1.4후퇴’란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그게 바로 이 사건이다. 우리 군대는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에 나섰다. 두 달 만에 서울을 되찾았다. 이때부터 양쪽 군대가 서로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점점 장기전으로 이어졌다. 7월에는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정전회담이 시작됐다. 이 협상은 무려 2년을 끌었다. 1953년 7월 27일에 가서야 마침내 협상이 타결됐다. 3년 1월간 계속된 6.25 전쟁이 비로소 끝난 것이다. 국민들은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까? 국민들이 고민 끝에 모여 있었던 곳은 영화 ‘국제시장’에 나왔던 것처럼 부산이었다.
옛 말에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국가 간의 전쟁에는 수많은 변수가 존재하기 때문에 상대의 수를 예측하기가 힘들다. 그럼에도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장군이 있다면 그 사람은 단연 명장이다.
북한과의 통일 기회를 놓친 것은 매우 아깝지만 전쟁에는 언제나 서로간의 긴장감과 견제가 끊이지 않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할 것일 수도 있다. 지금 와서 두 나라가 싸우면 어느 쪽이 이기냐고 묻는 것은 바보 같은 질문이지만 언제 봐도 매우 민감한 질문이다.
'나의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과학) 새로운 과학, 놀랍지만 그래도 멀었다. (0) | 2017.01.06 |
---|---|
(전쟁 끝) 새로운 천년의 시작, 밀레니엄 (0) | 2017.01.05 |
(공산주의) 공산주의 국가의 새로운 나라, 중국 (0) | 2017.01.03 |
(분단 국가) 독일, 우리와 같은 고통 (0) | 2017.01.02 |
(전쟁) 세계대전 이후.. 각 회담들 (0) | 2016.1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