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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산미증식계획, 조선은 일본의 호구? 본문
우리 인간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열심히 일해야만 먹고 살 수 있었다. 아주아주 오래 전 인류는 나가서 사냥과 나무열매를 구해오는 일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었다. 그러다가 점점 계급사회가 생기고 나서 곡식을 재배하는 법을 알게되고, 가축을 키우는 법을 알게됐다.
가축을 키우면서 보다 쉽게 먹고 살 수 있게 됐다. 곡식을 재배하면서 점점 먹고살기가 풍요로워지고,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고, 결국에는 도시국가가 생겨났다. 이번에 살펴볼 것은 얼마나 우리 민족들이 곡식 때문에 힘들어했는지를 알아보자. 경제 수탈은 계속되고 결국에는 여자건 남자건 할 것 없이 모두가 나섰다.
1918년 7월 일본 도야마현에서 앞치마를 두른 가정주부들의 시위가 벌어졌다. 마치 노무현 정부 당시 자영업자들의 솥뚜껑 시위를 연상케하는 장면이었다. 경찰과 주부 데모대와의 충돌로 발전한 이 사건은 일본 사회의 큰 주목을 끌었다. 주부들의 주장은 살인적인 쌀 가격의 폭등을 진정시키고 품귀 현상을 해결하라는 것이었다. 여기엔 이유가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시기 일본은 전쟁 특수로 큰 호황을 누렸다. 공업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많은 ㅈ농민들이 도시로 나와 노동자가 되었다. 호황으로 쌀 소비는 늘어났지만 생산자가 줄면서 공급이 뒷받침되지 않는 구조가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이내 가격은 폭등했고, 매점매석으로 쌀 구경조차 힘들어졌다. 그러자 주부들이 부엌을 박차고 나와서 시위를 벌인 것이다. 이사건은 폭동화되어 일본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내각 사퇴와 ‘다이쇼 데모크라시’라는 새로운 정치 체제가 수립의 배경이 된 쌀 폭동이 발발이었다. 식민지는 이런 상황에서 써먹으라고 있는 것이었다. 결국에는 조선총독부가 총대를 메고 나섰다. 1920년 총독부는 ‘쌀 증산이야말로 식민지 시장에서 가장 큰 목표’라는 방침 아래 산미증식계획을 수립했다. 조선에서의 미곡수탈로 일본의 식량문제를 해결하려는 계획이었다. 아울러 이를 통해 저곡가, 저임당 체제를 유지함으로써 일본의 자본주의적 발전을 더욱 가속화시키려는 시도였다. 1920년대 일제의 경제수탈에서 산미증식계획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산미증식계획은 토지, 수리, 종자개량 등의 방법을 통해 쌀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늘리는 것을 골자로 했다. 이를 위해 밭을 논으로 바꾸고 간척, 개간사업을 벌이는 한편, 우량품종을 보급하는 등의 사업을 펼쳤다. 그러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목표도 무리였고, 자본도 부족했기 대문이었다. 1925년의 경우 토지개량이 완료된 곳은 목표의 61퍼센트에 불과했다고 한다.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산미증식계획은 단지 쌀이 부족한 일본의 배를 채워주기 위한 방식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 계획으로 폭동을 잠재우고자 하는건 알겠으나 결국 조선 농민을 일본의 호구로 본 것과 다름없다.”라고 말이다. 대한제국이 식민지가 되어버린 이상 지배자 되는 일본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왜 그렇게 지배하는 것에 일본은 집착한 것일까?
대한제국을 지배하는 것보다 서로간의 타협으로 어느 정만 서로 녹아든다면 지배하는 것보다 더 좋은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긍정적이어서 나쁠 것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일본 측에서는 오로지 대한제국의 모든 것을 지배하기를 바랬다. 마치 하이에나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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