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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제2의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 설립운동 본문
물산장려운동을 함으로써 우리나라의 경제를 조금씩이라도 살리려고 하는 시민들의 노력은 아쉽게도 초반에 한창 불타올랐던 만큼 후반부에서는 싸늘할 정도로 열기가 식어버리고 말았다.
물산장려운동이 경제적 실력양성운동을 대표한다면, 민립대학 설립운동은 교육적 실력양성운동을 대표하는 움직임이었다. 민립대학이란 미간이 주축이 된, 즉 ‘조선인에 의한, 조선인을 위한’ 대학을 의미했다. 당시 일제는 기껏해야 3년제 전문학교만을 허용하며 고등교육에 대한 조선인의 열망을 억압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의식으로 무장한 뛰어난 인재를 양성하는 일은 민족의 생존을 위한 급선무로 인식되었다.
민립대학 발기취지서의 “우리들의 생존을 유지하며 문화의 창조와 향상을 기도하려면 대학의 설립을 빼고는 다른 길이 없도다”라는 선언은 이 사실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실력양성운동이 표방하던 신문화건설론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었다. 민립대학운동에 맞서 일제는 제2차 조선교육령 속에 대학령을 두는 등 선제적인 조치에 들어갔다. 김을 빼자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민족운동가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이상재, 이승훈 등이 주축이된 발기인 1,170명이 조선민립대학기성준비회를 발족시켰다. 3기 계획으로 이뤄진 이 운동은 총 1,00여 만원의 비용이 드는 대사업이었다. 기성회 측은 국채보상운동 당시 모금된 600만원을 설립기금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했다. 또 “조선인 1천만 인이 1인당 1원씩‘이라는 의욕적인 모금 계획으로 최대의 난제인 재정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전국 100여 곳의 부, 군에 기성회 지방부가 설치되는 등 민립대학 설립운동은 큰 성원 속에 추진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민립대학 설립운동도 물산장려운동처럼 불과 1년여 만에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왜일까? 먼저 일제의 탄압과 방해공작으로 모금운동이 제대로 추진되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일제는 운동의 중심 인물들에 대한 집요한 미행, 감시와 아울러 전국의 부호들을 협박해 사업추진을 위한 ’돈줄‘을 끊어버렸다. 모금운동의 대부분을 이들에게 의지했던 추진세력으로선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1924년부터 2년 연속 수해가 발생해 모금운동의 동력이 급격히 떨어진 것 역시 치명타였다. 가난한 조선 민중의 호주머니가 더욱 움츠러들었던 것이다. 사업의 태반을 차지하는 재정 문제가 이처럼 난관에 봉착하자 운동의 열기는 급격히 식을 수밖에 없었다. 누구든지 일단 살아야하기 때문에 운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제에게서 한시라도 빠르게 구원받고자 했던 그들이 모금운동에 적극적인 참여를 했으면 했지, 하기싫어서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물산장려운동은 6개월 밖에 못 이어졌지만 민립대학 설립운동은 1년이라도 이어질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라고 말이다. 일제의 탄압이 더 강했더라면 이 민립대학 설립운동도 얼마 못가서 끝났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운동이 지속되어서 사람들이 참여했다고 생각하면 그 때 그 시절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할지 모르겠다.
대한민국은 언제나 시민이 있었기에 대통령이 있을 수 있는 나라였다. 서로가 서로를 존중해주지 않는다면 이 나라는 진작에 망했을 것이다. 아래에서 받쳐주는 사람이 없다면 위에있는 사람은 그 자리에 올라설 수도 없다. 언제나 이것을 마음에 새기며 살아야 한다. 과거에 우리나라가 저렇게 힘들었으니 이제야 우리나라도 전 세계에서 인정 받을 수 있는 나라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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