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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각

(일제시대) 대규모 조직, 신간회

MasterJo 2017. 2. 22. 18:02

우리나라에는 많은 항일운동이 있었지만 이번 항일 운동은 우리나라 역사에도 꽤 큰 케이스를 차지하는 정도이다. 바로 신간회가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신간회는 식민지 시대 최대의 항일사회운동단체로 알려져있다.

 

1927215일 오후 7, 서울 종로 기독교청년회관 대강당에서는 신간회라 불리는 한 사회단체의 창립대회가 있었다. 회원 250명에 방청인 1000여 명이 빼곡이 자리를 매운 대규모였다. 규모도 규모지만 다른 면으로 봐도 대회장의 풍경은 자못 진기했다.

 

그 자리에는 이상재, 홍명희, 안재홍, 신석우, 허헌, 이종린, 신문지상에서나 보던 민족운동의 거두들이 총출동했다. 너나없이 말쑥한 양복과 한복 차림을 한 이들의 모습은 마치 명사들의 여유로운 회합인 듯한 착각마저 안겨주었다. 그래서 이 대회를 두고 투사의 모임에 있는 기분보다 신사의 다과회에 있는 시분이라는 전언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날의 대회는 한가로운 표현과는 거리가 멀었다. 신간회란 조선 사회에 존재하던 대표적인 좌우 인사들이 결집한 식민지 시대 최대의 항일사회운동단체였다. 이상재, 안재홍 등의 조선일보계, 한용운의 불교계, 조만식의 기독교계, 이종린의 천도교계, 그리고 사회주의계의 김준연, 홍명희, 한위건 등 비비협적인 민족주의 좌파 진영과 사회주의 세력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는 220개의 군 가운데 143개 군에 지회가 설치되고 회원 수는 무려 4만에 이르렀던 엄청난 단체였다. 조선을 넘어 일본 도교와 오사카에도 지회가 설치되고 여성계의 근우회 같은 자매조직을 거느리는 등 신간회는 말그대로 최대라는 수식어에 딱 맞는 조직이었다. 엄흑한 식민지 조건 아래서 이런 대규모 조직의 탄생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또 신간회는 어떤 활동을 벌여나갔던 것일까? 신간회의 결성이 처음 논의된 것은 1926년 겨울이었다. 이때 평안북도 오산학교의 교사로 일하던 홍명회는 휴가를 맞아 경성의 최남선을 방문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날 최담선은 당시 민족 우파가 추진하던 자치론의 구상을 홍명희에게 들려주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은 홍명희는 그 길로 민족 좌파의 지도자인 안재홍, 신석우 등을 찾아가 대책을 논의했다고 한다. 그 결과 우파의 타협적인 망동에 대항해 민족협동전선을 근깁히 조직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날 신간회 결성의 첫 발이 떼어진 것이다. 신간회의 규모와 파워는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일본군 쪽에서는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강한 무기가 있다고는 하나 4만 명이라는 사람들이 일제히 다방향에서 치밀한 계획을 세워서 움직였을 때 그것을 막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설령 막아낸다 하더라도 일본군 쪽에서도 꽤나 큰 타격을 입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신간회의 규모는 실로 놀라웠다 그러나 그들이 그 규모를 가지고 조금만 더 시간을 들여서 치밀한 작전을 세웠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라고 말이다. 물론 4만 명이라는 대 인원의 비해서는 조금 아쉬운 결과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래도 훌륭한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일제시대 때부터 고통받아온 우리 민족들은 당연히 일본사람들에게 거부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본다, 하지만 그래도 자기가 저지르지 않은 죄를 뒤집에 쓰기에는 그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봤을 때는 당연히 억울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