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를게임같이
(임진왜란) 임진왜란 시작 전 1년, 그 동안 조선정부는 무엇을 했는가? 본문
우리는 미리 알려진 것에 대해서 미리 준비하지 못한다면 그것만큼 멍청한 것이 없다. 하지만 이미 조선에서는 그런 상황을 겪었었는데 바로 임진왜란 때이다. 이것으로 인해서 많은 피해를 입게 되는데 이번에는 그것을 알아보자.
임진왜란은 전에 말했듯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전쟁이다. 일본과의 교역을 모두 끊어버린 중국과 조선, 그 상황에서 일본은 상당한 위기를 느꼈다. 도요토미는 다시 한 번 양 국에 정규무역을 요청했지만 양국의 정부는 일본에 대한 불신으로 그 마저도 거부해버리고 만 것이다. 궁지에 몰린 일본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었는지 전쟁을 강행하기 시작했다.
도요토미는 1588년 조선에 사신을 보내 통신사 파견을 요청했다. 무역재개를 위해서였다. 이때 조선정부가 거절하자 도요토미는 사신으로 갔던 신하의 가족까지 상해하면서 분노를 표현했다. 일본으로서는 그만큼 생존이 걸린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전쟁을 준비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그리고 시간을 흘러서 1591년 3월 일본은 조선에게 “명을 정벌하러 가는 길을 빌려달리”라고 말하면서 정명가도를 요구했다. 이것은 곧 전쟁선포였다. 중국과 이어진 대륙이 일본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바로 조선이었는데 일본은 길을 빌려달라는 목적으로 조선에 침입해서 조선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릴 작정이었던 것이다. 겨룩 4월 왜군은 부산을 공격하면서 전쟁을 시작했다. 전쟁시작까지 1년이 넘는 시간이 있었지만 조선정부는 전쟁에 대한 구체적인 준비를 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곧 당시 조선정부의 무능함을 보여준다. 1년 이라는 시간은 어떻게 보면 무언가를 준비하기에는 딱 알맞은 시간이다. 그 시간을 헛되이 사용했으니 당장 호랑이를 앞에 두고 생고기를 들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이러한 상황이었으니 당연히 조선군은 속수무책이었다. 전쟁으로 조선은 17만 명에 가까운 병사가 목숨을 잃었고 경작지는 3분의 1로 줄었으며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인질로 끌려갔다. 또한 명에 지원을 요청한 탓에 전후 조선과 명과의 관계에서 일방적으로 수세에 몰리는 난처한 입장에 되었으니 이것을 두고 사면초가라고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당장 조선에서는 병력이 부족했고 명에게 구언요청을 하지 않았더라면 더 빠르게 조선이 함락 당했을 것이다. 일본이 당시 잡아간 사람들 중에서는 유능한 학자나 기술자들이 많았는데 이 때문에 일본은 엄청난 문화적 이득을 볼 수 있었고 에도 막부의 문화중흥시대를 열었다. 일본은 전쟁을 통해 문화산업 발전의 계기를 만들었던 셈이다. 만약에 1년이라는 시간 사이에 좀 더 철저하게 대 일본 정책을 세웠더라면 일본에게서부터 우리 학자들과 기술자들을 지킬 수 있었을 것인데 정말 그 당시 정부의 상황을 이해하기는 힘들다. 전쟁이 워낙에 양 쪽 다 피해를 보는 것이기는 하지만 일본은 피해를 본 만큼 많은 이득을 가져갔다. 후에는 명나라에서 온 병사들의 장비들 덕분에 방패도 갈라버리던 일본도의 대응책을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 일로 명나라에게는 두고두고 트집을 잡혔다.
역사학자들은 말한다. “임진왜란 반발 1년 전 이 시간에 왕과 신하들이 잠을 조금 줄이고 일본을 상대할 작전을 짰더라면 조선이 일본에 밀리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이다. 조선은 예로부터 타국의 지배에 대해서 상당한 방어력을 갖춰왔다. 그러나 이번 임진왜란에서는 아무런 준비가 없었기 때문에 밀렸던 것이다.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지만 내가 이득을 보고 적에게는 어느 정도의 최대한 피해를 줄 수 있는지 말이다.
'나의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역사) 사회의 악, 뇌물수수 (0) | 2017.08.25 |
---|---|
(인조) 소현세자와 인조 (0) | 2017.08.23 |
(임진왜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생의 실수 (0) | 2017.08.21 |
(역사) 중종과 조광조 (1) | 2017.08.18 |
(역사) 폭군 중의 폭군, 연산군 (0) | 2017.08.17 |